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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인문학은 과학으로 정확해지고 과학은 인문학으로 깊어질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 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 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먼저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란 책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유시민작가는 왠지 과학에 대하여 문과인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문과스럽게 알려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코스모스'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유를 나는 '칼 세이건'이 물리학, 천제물리학, 천문학뿐 아니라 인문학까지 두루 섭렵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읽으면서 나는 조금 아쉬웠다.  한국적 정서에 맞게 과학을 알기 쉽게 전파하는 과학자는 왜 없을까. 그러던 찰나에 자칭 지식소매상이라고 소개하는 유시민작가가 책을 낸 것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는 스무 살부터 30년 동안 인문학 공부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온 그가 과학을 공부한 이유를 '거만한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었단다.  하긴 우주에 탐사선을 보내고 과학의 발견이 세포단위로 나오는 이 시대에 호기심 없이 안주할 사람이 아니지.  


유시민작가의 고백처럼 나 역시 '운명적 문과'다.  운명적 문과란 표현은 저마다 수학 공포증에 떠밀린 사람들을 저자가 재미있게 비유한 말이다.  인문학은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욕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수많은 인문학 이론이 있지만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인 판정은 지금까지 내릴 수 없었다.  인문학은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만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이론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것이 인문학의 가치이자 한계인 셈이다.  모든 것이 선명해진 21세기에 인문학은

거대한 장터에서 살 것이 다양하게 없는 동네시장과도 같은 처지다.  저자는 인문학에 그러한 지적 한계를 과학적 사실로 가치를 키우길 바랐던 것 같다.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우리 인문학이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궁금증을 가장 많이 해소한 학문은 뇌과학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나'에 대한 인문학의 근본 목적을 접근하기 가장 적합한 '뇌과학'으로 이 책의 서문을 열었다.  그리고 뇌과학에 이어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순으로 우주까지 확장해 나가는 저자의 실력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물리학 부분에서는 '코스모스' 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했지만 나로서는 만족감이 컸다.  유시민작가만의 코스모스 해석일 테니까.


저자는 인문학의 오래된 논쟁을 꺼내며 과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인간의 의식에 대한 오래된 궁금증 중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또는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 유전학적 호기심이 있었다.  칸트는 '선험적(아 프리오리)'와 '경험적(아 포스테리오리)'에 대해 인간은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아도 도덕법을 알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증거를 진화생물학자가 밝혀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를 통해 도덕이라고 하는 사회적 본능을 획득했다는 것인데, 서로 교류하지 않은 문명들에게서 살인, 절도, 폭행을 금지하는 법률이 똑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맹자의 '성선설'은 신경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거울신경세포'라 하여 원숭이 실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에도 좋은 행동을 따라 하는 뉴런을 발견해 낸 것이다.  또한 맹자의 사단설 -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역시 인간의 뇌에 존재한다고 밝혔다. 에드워드 윌슨의 말처럼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의 마음은 세계를 일부 밖에 보지 못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읽다 보니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와 과학적 결과물들은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인문학을 옹호했던 저자는 현재까지의 뇌과학의 결과물을 토대로 뇌의 존재 이유를 냉정히 밝힌다.


"다른 동물의 뇌가 생존을 위해 조합된 기계임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뇌도 그렇다고 해야 앞뒤가 맞다.  돌이  날아오면 몸을 틀어 피하는 무의식적 반사행동부터 파생금융상품을 매매하는 전략적 의사결정까지, 우리의  뇌는 외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신속하게 받아들여 적절한 대응책을 찾는다.  왜? 생존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뇌의 존재 이유다."



뇌의 존재이유를 '자아'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출발한 그의 접근방법을 나는 강하게 느꼈다.  우리의 자아는 쉽게 흔들리고 비틀거린다.  젊어서는 진보였던 사람이 어느 날 보수로 전향되어 놀란 경험을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그것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배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불안정하므로 자유의지 역시 강고하지 않다는 점을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에서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세상에 맙소사.  그들의 자아는 생존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인문학의 자아를 뇌과학에서는 '뉴런의 연결'쯤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과학이론의 선택적 취사로 인한 인문학적 병폐로는 다윈의 '진화론'을 들 수 있겠다.  다윈의 이론은 '자연선택론'이 더 정확한데 대부분의 사람들 '적자생존' 즉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 정도로 이해한 것 같다.  강자만이 살아남아 진화한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 이론을 우파는 인종차별과 노예제도로 정당화했고 사회다윈주의는 유럽 유대인 600만 명을 죽인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자연선택과 진화는 특정한 방향이 없음에도 해석의 오남용으로 인한 인류의 혁명과 폭력은 수없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


다윈의 이어 생존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는 이론이 나왔는데, 바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다.  그는 모든 생물의 DNA가 동일한 알파벳으로 씌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음을 입증했다.  또한 도킨스는 동물 개체군의 행동 패턴 분석 모델을 보고  'ESS 모델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을 발견한다. 동물행동학 모델로 저자는 역사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흥미로웠다.  


"공산당은 모든 기업을 국가 소유로 만들었고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개조했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만인에게 일자리를 주었지만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동일한 보상을 주었다.  소련 인민에게 체제는 '주어진 환경'이어서 누구나 어떻게든 적응해야 했다.  선택가능한 적응 전략은 둘이었다.  '성실'과 '태만'이라고 하자.

(중략)

어느 전략이 생존에 유리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태만'이었다. '성실'하면 건강을 해치고 일찍 죽었다.  결과적으로 '태만'이 소련이라는 인간 군집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되었다."



저자도 건의하듯이 인간의식과 행동에 대해 생물학적 연구결과를 인문학적 고찰로 적극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인간도 동물이므로 인간의 사회성 행동에 충족하기 때문이다. 학문은 권력이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웃음이 났다. 아마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생물학의 특수분야로 말한 윌슨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모양이다.


물리학과 수학으로 이동한 유시민작가는 우주를 이야기한다. 양자역학까지 얘기할 때는 아무리 문과 남자가 얘기해도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난 영원히 이해 못 하겠군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면 외우면 된다. "빛이 입자이고 파동이듯이 전자도 입자이고 파동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뭐 어찌어찌 점수를 땄듯이 말이다.


그래도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라는 부분을 이야기하며 원자를 설명할 땐 좋았다.  어느 문과생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뜨거운 커피는 마시는 동안 미지근해진다.  아무리 정리해도 집은 어질러진다. 화를 낼 필요가 없고 화내봤자 소용도 없다.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 노화와 죽음을 면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딱하다.  보양식 섭취부터 혈액 교체와 세포 치료를 거쳐 유전자 조작과 장기 이식까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한다.  이번 생에서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 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 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의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코스모스'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먼저 읽었다면 짜증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책에서 '도플러 효과'가 나올 때는 아는 내용이라 신나기도 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물리학은 어찌 보면 겸손을 외치는 인문학과 많이 닮아 있다.


유시민작가는 과학에 대해 진심으로 공부한 것 같았다.  공부하면서 가장 쉽게 문과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전달하려고 애를 쓴 것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호기심은 공부로 가는 첫 번째 계단이다. 이 책을 읽은 문과생들은 최소한 과학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지만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는 뇌과학의 발견을 나는 신뢰하고 싶다.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남은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이왕이면 즐겁게 살고 싶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인문학은 과학으로 정확해지고 과학은 인문학으로 깊어질 수 있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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