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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형이상학적인 대화에 끼고 싶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막연하고 대답하게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답하기 어렵다는 것을 근거로, 진리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동시에 진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던가?
(중략)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함." 이러한 속성을 손에 쥐고 인류는 역사의 시간 전체를 통틀어 진리를 기다려왔다. 출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진리의 후보자인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를 주시하며, 무엇이 진리인지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는 현실 너머의 우리가 진리라 말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오자마자 화제가 되었던 1권에서는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라는 현실과 밀접한 이야기였다면, 2권은 '형이상학'적인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저자는 '진리'의 규정으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지식전달의 수준을 정확히 이야기하며 거론하며 시작한다.  즉, 철학이나 종교,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원활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입문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이해 수준으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 이해력만 있어도 충분히 우리는 지적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겐 고마운 책이었다.  맞다.  우리의 삶은 넓고 얕은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먼저 기본 세 가지 중심개념(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들을 잡고 있으면 이 책에서 전달하려는 '현실너머' 개념들을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절대주의: 불변하는 단일 진리를 상정하는 태도
- 상대주의: 변화하고 운동하는 현상 세계와 진리를 고려하는 태도
- 회의주의: 보편적 진리나 그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거부하는 태도


즉, 절대주의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단일 진리를 추구하는 입장이고, 상대주의는 변화하는 다양한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철학의 주도권을 놓고 다퉈왔는데, 이 둘에 비해 초반에는 존재감이 없던 회의주의는 단일한 진리를 부정한다는 면에서는 상대주의와 유사하지만 극단적으로 인간이 진리에 도달할 방법이 완벽히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 이 회의주의는 세련된 형태로 '포스트모던'을 탄생시킨다.


진리의 속성인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을 충족하는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에 따른 철학사에는 여러 철학자들이 있었고, 각각의 주장하는 사상은 차이가 있지만 결국 저자는 철학의 기본틀에서 이 세 가지 진리 속에서 묶어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예시 철학자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 소크라테스(진리의 절대적 토대구성) -> 플라톤(불변하는 '하늘' 진리의 세계 '이데아' 절대주의 제시)
-> 아리스토텔레스(변화하는 '땅-물리학,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상대주의 제시)


철학 변천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진리의 대상 역시 종교(절대주의)에서 이성중심 분위기로 사회가 지배된다. 여기서 세분화되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분야가 구체화된다. 종교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허무주의적이고 회의적인 분위기 형성이 그 원인이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상에는 확고한 진리가 필요로 했고 철학의 전환점을 시작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의 이 결론은 모든 사유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부터 모든 세계를 증명하려는 시작을 알리는 이유였다. -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 신, 세계를 증명(합의론) 이후 많은 철학자들의 진리에 대한 증명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그중에서 철학의 큰 획을 긋는 철학자는 '관념론'을 제시한 '칸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칸트는 그동안 보편적 이성을 추구했던 합리론과 개별적 경험을 진리라 제시했던 경험론의 소모적 논쟁을 끝마쳤다. 그는 자연철학(과학)을 겸한 철학자였다.


눈앞에 빨갛게 잘 익은 사과가 있다. 나는 이 사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본다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우선 광원이 있어야 한다. 태양이나 형광등이나 촛불이나 빛이 나오는 근원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 광원에서 입자이자 파동인 광자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간다. 튕겨 나온 광자의 일부가 눈으로 들어오고 망막의 시각 세포를 자극한다. 시각 세포는 빛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꾼다. 이 전기적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전달된다. 뇌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어떠한 감각기관도 없지만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은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뇌가 해석한 이미지가 나의 내면에 드러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느낀다. 눈앞에 잘 익은 빨간 사과가 있다.



나는 이번 독서를 통해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이해를 이렇게 알기 쉽게 풀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철학자들에 대한 인문학적 깊이와 심연의 역사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칸트외에 니체(회의주의), 하이데거(절대주의 계열), 비트겐슈타인(상대주의 계열), 사르트르(회의주의 계열)등 많은 철학자들의 입장들의 기본틀이 이 책 안에 열거되어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철학분야의 진리 쪽이 워낙 임팩트가 강했다. 과학분야에서는 실험과 관찰의 이론이 워낙 강력한 까닭에 휘리릭 넘어간 기분이 든다. 예술과 종교는 어찌 보면 한 세트로 시대상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분야의 진리추구 목적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삶의 방향을 표현했다면 옳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과연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진리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의문스러워진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세계관을 논박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진리의 세계관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거대한 우주 속에 한 생물로써의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수많은 사유의 역사를 넘어 현재의 시간까지 도달한 이 책의 결론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결국 우리는 주관적 경험으로 살아갈 테지만 타인과의 대화에는 열린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를 것이다.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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