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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_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



오랜 강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날분들은 가르치는 것을 '깨우친다'라고 했습니다.  모르던 것을 이야기만 듣고 알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그림을 보여드리면 여러분은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앨범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입니다.  나는 20년의 수형 생활 동안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대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그간 몇 번을 읽으며 책장을 들락거렸다. 그분의 마지막 강의가 담긴 내용이 너무나도 간명하면서 묵직하고 소중해서였을 것이다.  자세를 고치고 다시 첫 장부터 읽는데, 공부에 대한 개념부터 남다르게 다가온다.


신영복교수님은 2016년 1월에 피부암으로 돌아가셨다.  1968년 반체제 지하조직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하다 20년 만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셨고, 이후 고된 수감생활의 보상차원에서라도 편히 노후를 보내셔도 무관하련만 25년간 대학강단에서 강의하셨다.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겸손하게 들려주신 마지막 책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기 앞서 밝힌 공부(工夫)의 의미를 읽다 보면 반듯한 자세가 절로 하게 된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니라 소외 구조에 저항하는 인간적 소통, 관계를 위함이다.  나를 상품화하지 말 것이며, 부단한 노력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라는 시대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고전문학, 역사, 철학의 이성훈련인 공부에 갇혀있다고 지적하신다. 문사철을 뛰어넘는 감성훈련 공부인 시서화로 확장시켜 언어를 초월하고 사실을 초월하는 고정된 인식탈피가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의식의 전환, 공감, 포용, 관용의 필요성은 결국 인간관계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이 책은 '신영복 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문학, 역사, 철학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해석을 덧붙여 신영복교수님의 사상을 배우고 싶은 독자라면 입문서로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용은 총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고전에서 읽은 세계 인식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동양고전의 명서인 시경, 주역, 논어, 맹자, 한비자를 바탕으로 현대사회를 보는 관계론이다.  어렵다 생각할 즈음엔 동양고전의 이야기를 현대를 비유해 설명해 주신다. 


나는 법가사상의 '한비자' 속 하나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신발을 사러 간 차리리의 탁(度)과 족(足) 이야기다.  신발을 사러 장에 간 차리리는 발을 본뜬 '탁본'을 집에 놓고 와서 결국 신발을 못 사고 돌아간다는 어리석은 얘기다. '완고한 인식틀'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면 현실을 대면하지 않고 현실을 본뜬 '탁'을 찾으러 인터넷을 뒤진다. 교수님은 우리의 사법현실을 비유한다.  정치인이나 경제사범은 '불법행위자'로 얘기하고 일반시민의 절도, 강도에 대한 사범은 '범죄인'으로 분류하는 인식의 차이를 지적한다.  한쪽은 그 사람의 ‘행위’만이 불법임에 반하여, 다른 쪽은 ‘인간 자체’가 범죄인이 된다.  완고한 인식틀인 것이다.


2부는 20년간의 수감생활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바를 엮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이야기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담대하게 그려내고 있다. 징역살이의 고달픔 보다 국가권력의 편지검열에서 무너지기 싫었던 자존심을 보여 주신다. 냉철함이 견딜 수 있는 힘이었다니 차마 따라 할 수도 없는 존경심이 느껴졌다.


검열편지에서 미처 쓰지 못했던 내용들이다.

재소자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얻은 교훈, 관계 속 성찰들이 담겨있다. 똑같이 재소생활을 했어도 그분과 같은 성찰을 얻기란 힘들 것이다. 고통과 불안의 시간임이 분명한데 교수님은 역사학의 교실이었고, 인간학의 교실이었다 회고하신다. 감옥은 '대학(大學)'이라고.


책을 다 읽고 나자 나는 신영복교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에 새삼 눈물이 난다.




<담론_신영복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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