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빈곤한 생각에서 통로 찾기

작은애의 작곡 연대기


모든 것은 젊었을 때 구해야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빛이다.  

빛이 흐려지기 전에 열심히 구해야 한다.  

젊은 시절에 열심히 찾고 구한 사람은 인생 후반이 누구보다 풍성하다.

- 괴테




어느새 직장인 5년 차가 돼 가는 작은애는 퇴근하면 가장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미디키보드에 매달려 작곡에 여념이 없다.  일상적이고 활기 없는 직장생활에 낙인 것이다.  요즘은 전자음악에 꽂힌 듯 스피커에선 '우웅우웅' 시동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다.  정비 중인 차는 언제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게 될까 궁금해 이번엔 무슨 작곡이냐고 기웃거리면 반가운 기색으로 신나서 설명을 해주지만 도통 모르는 소리뿐이다.  재미있어하고 반짝이는 두 눈을 확인하자 두통이 올 것 같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나는 그냥 어서 정비소리만 멈추길 바라며 문을 닫고 나온다.



작은애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상당히 많은 아이였다.  쉽게 몰입하고 흡수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포기도 빨라 결정번복이 잦았고 그 때문에 본인도 힘들어했다.  초등학생 때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멜로디언을 부는 모습이 안쓰러워 없는 돈에 피아노를 사줬다.  중학생 때는 서태지에 빠져서 일렉기타를 동경했다.  



남편은 한 가지라도 결정해서 꾸준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취미든 재능이든 합리적이라 말했지만 아이 성품상 어려운 주문이었다.  반면 나는 어렸을 때야말로 이것저것 만져보고 해체해 보고 포기를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포기를 경험해야 후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작은애의 취미 종착역은 작곡으로 압축된 것 같다.  작은애의 음악사랑 연대기는 어미라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흥미롭게 이어진다.  그것은 일상을 기록한 힘에서 비롯하는 데, 나는 유일하게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온전히 기억하며 기록한 엄마다.  작은애는 자신이 지금 관심 있어하고 일상을 힐링하고 있는 유일한 음악에 대한 시작을 정확히 모른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학예회 때 부모님들 앞에서 발표하고 싶은 사람을 지원받겠다고 하셨다.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작은애는 손을 번쩍 들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끙끙대며 생애 첫 번째 작곡을 하게 된다.  케논 변주곡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떡하니 내게 보여준 곡의 제목은 'First step'이다.  



작은애의 첫 번째 작곡


고무된 선생님은 네 명의 아이들과 조를 짜서 리코더로 연주를 맞추라는 학예회 D-day 말미를 주셨지만 오합지졸 연주자들은 끝내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다.  작곡자와 연주자들은 결국 선생님의 설득으로 '리리 리자로 끝나는 말은'과 '봄이 오면'을 부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형편없는 합의에 풀 죽은 아들은 첫 번째 연주를 좌절당하는 인생의 쓴 맛보게 된다.  



하지만 작은애는 음악이 주는 의지의 자유감을 깨달은 것 같았다.  이후 나는 어미입장에서 질풍노도라고 말하는 사춘기를 음악과 함께 한다는 점이 고마웠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전자기타(일렉)를 사달라고 졸랐을 때 남편의 허락도 없이 사준 것은, 첫 번째 연주를 못했던 보상이기도 했고 삶의 위로가 되는 음악이 친구가 되길 바랐던 마음이 먼저였다.  



괴테는 "재능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화력 좋은 작은애는 특별활동 클래식 기타반 선생님과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후 음악축제도 다양하게 참여했다.  어설펐던 아이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점점 농도가 짙어지고 확장되어 삶의 즐거움을 보탰다.  몰입도 최고치를 요구하는 수능 앞에서도 힘을 내고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음악 때문이었다고 난 강하게 믿고 있다.  



우리는 늘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다 하나의 길만 선택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을 하라면 '해야만 하는 일' 쪽에 손을 들겠지만 둘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치 있는 재산이 된다.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란 말이 있다.  인생의 허무를 느끼지 않고 살려면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혼자만의 여가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농밀한 행복의 통로를 알고 있다면 빈곤한 생각에 사로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하려고 애쓰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