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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존재의 이유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빈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화제의 장편소설 '고래'를 문학동네 3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나온 이제야 읽었다.  읽으면서 이야기 흐름이 굉장히 파격적이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소설 문법의 궤를 달리하여 규정짓기 어려웠을 뿐이지 읽기 어렵단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이끄는 화려한 입담의 변사식 화자(이야기꾼)의 설명으로 인하여 대혼란기였던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홀리듯 자연스럽게 읽혔다.  


소설의 배경은 한국사에 있어 가장 혼란했던 시기, 일제강점기 이후 극심한 이념갈등과 뒤이은 6.25 전쟁 그리고 독재정권의 탄생 및 무자비한 만행이 번연히 있었던 일들은 물론이고 모두들 '잘살아보세'라는 미명하에 무분별한 개발이 도처에서 진행되었던 산업화까지 맞물렸던 시기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민간인의 기록이 없던 시기인 만큼 있을 법한 이야기와 사건들을 저자 마음껏 꾸며내어 탄생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을 갖는 독자들을 향해 변사식 화자는 믿고 싶은 것만 믿으라며 책임지지 않겠다며 발을 뺀다.  오히려 심각하게 읽지 말고 마당놀이 하듯 한 판 놀아보자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이 소설은 혼란기를 무대로 삼아 그 시대를 살아간 세 여인의 삶을 녹아내고 있는데, 지난 세기의 역사적 표현은 없애고, 그 대신 변사인 화자가 세간의 이야기를 정리 내지 성찰에 가까운 주장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참 신기한 방식의 소설이란 생각이 내내 들지만 그렇다고 반론도 딱히 안들어 묘한 감정이 들었다.




혼란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빠른 판단과 체념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격동기를 다룬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서사의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의 법칙이었다'라는 정의를 내세우며 이의를 제기할 독자들을 단숨에 단념시켰다.  


예를 들어 이념의 촉발로 터진 한국 전쟁 속 군중의 아픔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그다음 주인공 금복의 서사로 넘어갈 때 방식이 이렇다.  


당시만 해도 산 것이나 죽은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죽음은 너무 흔해서 귀하게 취급받지 못했다.  남쪽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은 미칠듯한 증오에 휩싸여 서로 수백, 수천 명씩 한꺼번에 학살했다.  그들은 상대를 한 군데 몰아놓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했다.  건물에 가둬놓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들 가운데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감춘 채 아무나 붙잡고 상대방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에 한 분이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었다.  


그것은 이념의 법칙이었다.



어디에도 볼 수 없었던 이러한 진행방식이야말로 나는 이 거대하고 긴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추진력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짧고 굵게 그 시대의 군중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득력 있게 이해시키는 이야기꾼이 어디 있을까.  금복의 딸 '춘희'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무질서와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를 바라볼 때의 심정을 대변할 배경에는 또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 보니 사람들 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이 소설은 '노파, 금복, 춘희'의 시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주된 축을 이루는 주제는 '성욕(性慾)'과 '돈(세속)'이다.  사회적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두 여인(노파와 금복)이 신체의 성장에 따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성에 대한 충동적 해석이 자연스러운 삶의 법칙을 벗어남으로써 일어난 비극이라고나 할까.  그녀들의 잘못된 성에 대한 해석은 여지없이  변사식 화자에게 조롱당하고 눈요기 거리로 전락되고 만다.


노파와 금복은 남녀관계에 대해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난잡하다.  물론 금복의 행동에는 계기(엑스레이 촬영 이후)가 있었지만 그것이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해방감으로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노파의 돈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있기까지 서술은 과히 괴담 수준이다.  노파의 죽음은 젊은 시절 사내에 대한 욕정이 화근이 되었고 이후 자신을 처참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한 그들에 대한 복수에 '돈'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욕망의 화근은 유전처럼 '금복'에게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불운과 파멸의 원령이 된 '노파'와 복수의 돈을 우연히 상속받은 '금복'은 엄정한 인과응보의 섭리에 의해 치명적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신파적으로 과장된 소설 이야기지만 세상을 유지하는 법칙을 거스르고 돈의 세속적인 노예로 살기를 선택한 금복이 거대한 고래극장에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끝날 때는 허탈감에 휩싸였다.  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섰을 때야 회한을 느낄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란 말이  소설에 나온다.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행동의 결과는 결국 그 자신을 알리는 단초가 될 뿐이다.  


모성이 결핍된 노파와 금복에게는 '애꾸'와 '춘희'라는 딸이 하나씩 있다.  그녀들은 다행히 성과 세속에 찌들지 않은 본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노파의 딸 '애꾸'는 자연인이 되고 '춘희'는 벽돌을 굽다 죽는다.  


춘희는 노파의 저주를 받은 엄마의 세속을 억울하지만 온몸으로 걷어낸 인물이다.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노파 원령이 두부를 주는 장면이 있다.  노파가 더 이상 춘희에게 저주를 세속 하지 않고 떠난다는 의미다.


 춘희는 이 소설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순수한 인물이다.  외견상 그녀는 자폐아에 똥뼈를 가진 힘이 센 여자일 뿐이지만 온갖 무질서와 끔찍한 증오와 광포함의 세계에서 초연했던 인물이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했기에 자연과 사물 전체와 소통할 수 있었고 오직 친숙했던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순수한 존재였다.


춘희는 죽을 때까지 벽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장대했던 소설은 끝을 달리며 주인공들은 모두가 죽고 떠나고 사라지자 유일하게 '벽돌'만 남는다.  그것은 오로지 몰두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벽돌 굽기밖에 없었던 춘희의 행동에 대한 결과물이었다.  특별하고도 튼튼한 붉은색 벽돌이 필요했던 고집스러운 건축학자가 우여곡절 끝에 춘희의 벽돌무덤을 발견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지만 독자들은 알게 된다.  벽돌에 새겨진 그림을 찾아 춘희의 여정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고.  


먼저 세상을 떠난 코끼리 점보가 춘희에게 했던 말이다.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고래 / 천명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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