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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빈곤한 생각에서 VIP 생각으로



얼마 전에 '끝내주는 인생'이라는 산문집을 읽었고 조금 더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겨 읽어 보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그녀는 물론이고 주변인물과 가족들을 3 인칭 화하여 써 내려간 글인데 드라마로도 확정되었다고 한다. 공중파 드라마로도 그녀의 이야기가 충분히 수용가능한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저항이 결국 하나의 외침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소설은 스물두 살에 등단하고 글로 성공한 그녀가 스물여덟에 독립출판사를 설립하고 좌충우돌 살아가는 작가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작가로서 글을 쓰고 퇴고된 원고의 인쇄물들을 하나하나를 수정하고 완성된 출간물을 확인한 뒤 서점에 배포까지 하는 과정을 모두 진행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작가라는 직업의 위치에서 책 제목과 글의 내용은 당연한 것이고 한 권당 얼마씩 팔아야 적당 할지까지 판단하는 출판사 사장의 고민까지 덧붙여진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작가를 연상하던 독자들에게 그녀의 활약은 오픈된 전시장에 앉은 작가처럼 보인다.  각종 인터뷰, 사진촬영, 집회참석, 아이들 글쓰기 지도선생님, 요가활동 등 바쁜 그녀의 삶이 녹아있는 글을 읽다 보면 젊은 시대의 작가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그녀의 삶의 방식에 관심이 쏠리고 이유가 궁금한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능력 없는 가부장이라면 과감히 짐을 내려놓으라 말하며 스스로 '가녀장'이 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독립출판사 특성상 작가와 출판사 대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보조 역할로써 모부(母父)를 채용한다.  많은 시간을 도와주는 엄마는 정규직이고 업무특성상 덜 중요하고 시간이 적은 아빠는 비정규직이다.  이러한 채용방식이 낯설지만 모두가 합리적인 법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계약이기에 독자들은 신선하게 보인다. 부모(父母)라 말하지 않고 모부(母父)라 표현하고 부르는 것도 깨알같이 정규직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 점이라는 데서 즐겁게 읽힌다.


근로시간에는 가족이지만 서로 존칭과 존대를 깎듯이 지킨다.  그 점이 서두에 인지하고 읽음에도 어찌나 웃기는지 모른다.  가족이 함께 일을 한다면 종국엔 갈라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또한 그녀가 선입견을 깬 사례가 될 것이다.


그녀는 시대가 요구하는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대한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입장과 부조리에 대한 의문을 당당히 글로 써내려 간다.  일례로 그녀는 신체의 자유를 위해 답답한 가슴을 옥좨는 속옷을 벗고 생활한 지는 오래됐다.  공중파 패널로 참석했다가 속옷을 입으라는 피디의 요구를 당당히 거부하는 글이 있다.


슬아는 자신의 유두가 컨펌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게 웃겨서 푸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슬아가 웃자 모두가 쳐다본다.  웃음 뒤에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겨우 m&m 초콜릿 한알만 한 젖꼭지를 가지고 이럴 일인가.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거의 알아챌 수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포도알만 한 젖꼭지나 앵두만 한 젖꼭지 역시 문제 될 이유가 없다.

- 남의 찌찌에 상관 마  中



또 성실히 이 나라에 살면서 세금까지 따박따박 내며 살고 있는 여자 친구들의 동성혼을 법제화하지 않은 것에 화내며 안타까워한다.


여자끼리 결혼한다고 뉴스에 나오는 거 봐.  이성애자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걸 퀴어는 못 누리는 거지.  동성혼은 도대체 언제 법제화될지 모르겠어.  내 친구들도 미국 가서 혼인신고하고 왔잖아.  우리나라는 혼인을 인정하지 않거든.  결혼식을 해도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거야.  그런데도 내 친구들이 많이 멋진 결혼식을 해버렸지 뭐야.  덕분에 동성혼에 관한 논의가 확산된 건 정말 잘된 일이고.

-누가 여자 역할이에요?



한국의 근현대사의 발전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만큼 가족의 해체도 빨랐다.  30년 전만 해도 대가족이 나오는 드라마가 흔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4인 규모의 핵가족이 탄생했고 자식들의 자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독립이 흔해졌고 혼밥, 혼술이란 말도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지만 부모가 분가를 결정하면서 경제적 지원이 끊겼고 졸지에 가난해졌다.  행복을 위해 독립을 선택했지만 생계를 위해 모두가 일해야 했다.  그녀는 가난한 삶을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중심의 가부장 체제를 벗어나자 서로의 특성이 그제야 장막이 걷히 듯 보였고,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고 집안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앞장설 수 있었다.  그렇게 '가녀장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녀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지키며 당당히 두 발을 딛고 살아가길 바라는 시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사람들이 쉽게 씌우는 부류처럼 떨어져 나간 양을 찾지 않고 버릴 것인가.  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소중한 아들딸들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논의할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숨어있던 우리들의 양심을 깨우고 지식인들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고 개인의 온전한 행복을 지키는 일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그녀의 유쾌하면서도 담담한 글을 통해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인식한다.


우리의 삶이 퍽퍽한 것은 거대한 질서에 수긍하며 빈곤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이다.  삶은 권리처럼 찾을 수 있고 서로를 위해 지켜낼 수 있으며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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