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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인생

내 삶의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고생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농담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한다.  "오, 끝내주는데?" 임종 직전에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인생이었어."  그날이 죽는 날임을 미리 알아차릴 행운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메일 답장 대리인도, 마감 관리인도, 요가 강사도 아닌 전업작가로 가능한 오래 살아났으면 좋겠다.



벌써 열세 번째 책을 냈고 꽤 유명한 이슬아 작가의 책이라는데 이제야 나는 집어 들었다.  서른 중턱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작가의 이야기는 어른스럽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부끄럽게 느낄 정도로 묵직하고 참 아름다웠다.  이 산문집은 '이훤'의 사진으로 시작되는 독특한 산문집이다.  익숙해진 틀을 거부하는 젊은 발상을 선물 받으며 책장을 넘긴다.


우리는 멋진 감상을 받을 때 '끝내주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조금은 가볍지만 주위를 활기차게 환기시키는 표현을 사용으로써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는 젊은이를 나는 여태까지 본 기억이 없다.  그것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부딪쳤던 좌절과 슬픔과 고통을 흡수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체념과 위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삶에 시달리면서도 최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전업작가로 살다가 끝내주는 인생이었어!라고 말하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오래 살았어도 제대로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백발만 멋진 노인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오래 살아남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어른들은 기후재난의 끝을 향해 질주하는 문명의 횡포를 알지만 편리함 뒤에 숨어 입을 다물고 산다.  해상기온이 오르고 이상기후로 인해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 해변으로 몰려오면 잠시 걱정하지만 그뿐이다.  공장식 사육으로 고통받는 동물권을 자각하지 못한 채 회식은 오로지 고기라 외친다.  


독점체제로 변한 자본주의 사회의 횡포 속에서 우리 인간은 끝을 모르는 자연파괴를 즐기며 살고 있는 듯하다.  진화는 습득과 동시에 새로운 문명으로 대체된다.  그녀의 산문을 읽는데 가슴이 저렸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느끼는 감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속상함이 어른으로써 미안했다.


"젊은이들이 혹시 묻는다면 말할 것이다.  예전에는 나비라는 게 있었어요.  꿀벌이란 것도 있었고요.  바다에서 해수욕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었답니다.  가을은 가을 같았고 겨울은 겨울 같았고 봄은 봄 같았고 여름…… 여름은 너무 여름 같았습니다. 그 말을 하며 우리 중 한 명이 눈물을 글썽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녀의 말처럼 영장류의 최고봉으로 분류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동물과 비인간동물일 뿐이다.  조금 덜먹고 조금 덜 발전해도 충분히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다.  그래야 인간은 위엄을 지킬 수 있고 덜 슬프게 살다 죽을 수 있다.  


문학은 지식인들의 권력이다.  그 권력의 쓰임을 그녀처럼 맹주 하는 자본주의 열차의 노선에 정거장을 만드는 힘으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인간동물로써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고 서로의 슬픔을 견디도록 위로하며 소중한 자신을 회피하지 않으며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이야기가 세기의 발전보다 더 가치 있고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속삭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 산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편집자 김진형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가 나는 인상 깊었다.  그는 사랑이란 본래 정성과 예의를 갖추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침범해야 한다는 것이라 했다.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야기였지만 연인 또는 부모자식관계에서도 충분히 대입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탄생이자 죽음이다.  그것은 존재의 기원이다.  누구나 죽지만 유래의 기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서 존재하는 기원은 유전자의 힘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기억과 글로 재발견되기도 한다.  이슬아 작가가 고양이(탕이)의 죽음의 슬픔을 위엄 있게 부활시킨 것처럼, 아프게 배운 건 잘 잊히지 않는 것처럼, 계보로 복원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녀의 고양이(탕이)도 끝내주는 인생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끝내주는 인생이어야 한다.




<끝내주는 인생 / 이슬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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