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없이 자려고 노력한다. 가급적 일찍 저녁을 먹고 빈 속을 만든 뒤에 누워 포근한 이불을 목까지 덮고 긴 호흡을 내쉰 뒤 눈을 감는다. 여지없이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들이 행복한 잠의 의도를 흩트려 놓기 위해 기웃거린다. 나는 나의 상념이 만들어낸 허상들이 활보하도록 잠시 내버려 둔다. 상념들이 제 풀에 지쳐 뒷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본다. 이윽고 나는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든다.
요 근래 의도적으로 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도서들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러다 드디어 깨달았다.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나의 감정의 습관들은 현재 내게 필요한 평정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익숙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지키고 싶어 할 뿐이란 사실이다.
우리가 살면서 힘들어하는 것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원인이다. 이해해 줄 수 있는 관계라 믿었던 사이에서 오는 충격은 전쟁과도 같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동일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한 것도 그들의 수용에 까지 관여할 수 없으며 강요할 권한도 없다는 사실이다. 의무관념이든 결속된 윤리적 일체감을 느꼈던 끈이라 믿었던 것조차도 아집我執으로 포장된 오해다.
근심을 안고 잠이 든 날은 여지없이 동일한 풍경이 펼쳐지는 꿈을 꾸곤 했다. 등에는 항상 아기를 업고 있고 길을 잃은 나는 좁다란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끝끝내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어디로 가려고 그렇게 매번 힘들게 방황하고 있었을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체험이라고들 말하지만 그런 값진 체험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정성껏 관찰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무슨 놀이에 즐거워하는지 사랑으로 지켜봐야 한다. 아이는 존중받고 있다는 만족감에 부모와 교감을 하며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자존감을 키워갈 수 있다.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작지만 확고한 가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온갖 자질구레한 집안일과 하루가 멀다 하고 돈 때문에 싸우는 부모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는 서둘러 결혼을 결정했다. 이들과의 적당한 거리가 내게는 우선이었다. 그래야 내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끗한 도화지에 내 인생을 이쁘게 그리고 싶었다. 언니보다 먼저 떠나는 나는 친정엄마의 괘씸죄에 걸려 변변한 살림살이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꿀 자격도 안 됐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하등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외로움을 안고 어른이 된다. 나는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예견된 형제들과의 파멸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의 외로움의 정체를 발견한다. 그것은 존중의 부재였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애써 노력하고 어떤 형태로든 회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탄생은 제각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자신만의 고유한 형태를 갖춘다. 어느 것도 일치되는 것은 없다. 그들 고유의 삶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이러한 나만의 결론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면 도돌이표 외로움은 떨쳐낼 수 없다.
봄꽃의 이어달리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늘 다니던 산책길을 벗어나보니 5월의 덩굴장미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탐스럽게도 재잘거리며 매달려 있고 금계국 군락마저 휘둥그레 반갑게 마주하게 된다. 고무신을 신은 듯 폭신한 낙엽들의 무덤가 사이로 산딸기를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봄의 막바지 향연이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안전할 수가!
오유지족(吾唯知足).
남들보다 멋지게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닌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나는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안정된 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나답다고 느낀다. 어깨에 올려있던 책임감들이 걷어지고 오로지 가족과 나만 생각할 수 있게 완성된 지금이 감사하다.
꿈에 더 이상 골목길에서 방황하는 아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가 꾸며낸 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