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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눈에 안 보일 뿐 있기는 있는 것


파인 플레이가 귀해지는 건 비단 운동 경기분야 뿐일까.  사람이 살면서 부딪치는 타인과의 각종 경쟁, 심지어는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언쟁에서까지 그 다툼의 당당함, 깨끗함,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나는 아직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의 참뜻을 알고 있지 못하다.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中




소설가 박완서 씨가 타계한 지 어느새 13년이 넘었다.  2002년 출간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의 전면 개정판 산문집을 읽으니 그분이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고 그리움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나는 그분만이 가지고 있는 글의 힘을 좋아한다.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남성문학의 주류에서 꿋꿋이 버텨내며 발언권을 획득하고 인정받은 소중한 목소리의 시초기 때문이다.


박완서 씨는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불혹의 나이에 등단을 했다.  그 자극이 내겐 너무나 대단해서 당시 큰 전율마저 느꼈다.  현실이 고단하고 우울할 때 그분의 글은 내게 엄청난 위로였고 응원이었다.  그분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깨달은 시간들로 나는 성장했다.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하던 시간을 보내며 느꼈던 나의 분노의 감정들은 먼지처럼 가벼운 노여움이라 것을 깨달았다.  사회에 나와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유리천장의 한계에 부딪치며 좌절했을 때도 결코 소외되지 않고 스스로 다독이게 해 준 것도 그분의 글 덕분이었다.  


그것은 체험의 부피가 쌓인 부력의 전달 때문이었다.  글쓰기는 자신을 객관화하고 차오를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글을 쓰게 되는 시간은 경험과 영감이 만날 때라는 것이다.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그분이 살아온 한평생은 한국사에 있어 말 그대로 격동기였다.  사회가 급변하고 역사의 진행이 한꺼번에 쏟아지던 시기였다.  중일전쟁, 2차 대전, 가난, 쌀 배급, 해방, 6.25등 그녀는 엄청난 역사적 정치적 회오리에 휘말리지 않고 굳건히 그리고 그 엄청난 체험들이 작품의 밑받침이 되면서 한국 모계문학의 발원지로 그녀는 우뚝 서게 된다.


이 산문집에 수록된 에세이의 배경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로 20여 년간의 현대사 속 다양한 여성(엄마, 아내, 작가 자신)의 시점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정치적 후진성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던 시기였다.  국민 모두가 부자를 열망하던 시기, 진정한 개인주의자가 사라진 시기였다.  사람들 마음속에서 농촌은 노후하고 지루하여 서서히 소멸하던 시기였다.


또한 평범의 가치가 사라진 시기였다.


국민 모두가 잘 살기 이데올로기에 빠져 최고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게만 주목할 때 박완서 작가는 평범함을 수호한다.  생각해 보면 물질 제일주의라는 욕망은 이 시기부터 발원된 것 같다.  정당한 방법과 절차로 부자가 될 수 없는 시대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은 최고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허례허식을 탄생시켰고 '박에' 잘 사는 방법만을 찾았다.  잘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잘 사는 것만이 인생최고의 목표가 되면 평범함에서 발견하는 소박한 행복과 과정은 무시되고 생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범함이 왜 중요한가.  과정이 주는 행복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기 위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려움도 알고 재미도 느낀다.  때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면서 협동심도 배운다.  현재 내게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부터 아는 것이 바로 평범함이다.


이 산문집에는 부자에 대한 혐오감과 소시민의 물욕을 비판하는 에세이가 다수 수록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대적인 비판의식은 지식인으로써 마땅히 지향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라는 힘을 통해 소외된 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고 사랑만이 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라는 그녀의 시대적 분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읽힌다.  


그렇다고 그게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어온 유행도 아니라는 건 그쪽에 갔다 온 사람들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새로운 풍습은 벼락부자들 사회에서 비롯된 악습이 아닌가 싶다.  벼락부자들이란 부(富)에 자신이 있는 것만큼 내면은 허(虛)하게 마련이고, 여기서 비롯된 열등감의 발로가 그런 철없는 물량 공세로 나타난 것 같다.  또 벼락부자층과 권력층과의 정략결혼에서도 벼락부자가 과시할 수 있는 건 돈의 힘밖에 없으니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악습이 서민 사회의 풍습에까지 차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 난 박 잘 살 테야 中




산문집 전반에 흐르는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꿈속에서 분수를 모르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에 충분하다.  경제 성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생략되는 것이 평범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서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가 고착화된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물질의 향유 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뜬금없이 느끼며 자연을 찾는 이유는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농촌을 생략하고 살고 있지만 몸속의 유전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외손자의 돌보며 느끼는 감상은 그녀가 잃어버린 옛 동산의 그리움과 겹쳐져 아련하게 읽혔다.



아이는 곧 신발짝을 여기저기 벗어던지고 맨발로 놀지만 나는 구태여 신발을 신기려 들지 않는다.  아이의 흙 묻은 땅 위에 서 있는 토실토실한 두 다리가 마치 어린나무처럼 보기 좋아서이다.  어린 나무가 열심히 땅의 정기를 빨아올리듯이 나의 손자도 땅의 굳셈과 정식함과 늠름함을 그 실한 다리로 빨아들이는 것 같아서이다.


- 까만 손톱 中



가족을 이루고, 가족을 지키고 사는 평범한 삶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아이는 부모를 떠나 독립이라는 구실로 혼자를 선택한다.  비혼을 선택하기도 하고 결혼해도 아이 낳기를 꺼려한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평범을 포기한 이기주의적 선택이라 말하고 싶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거스르고 사회는 투쟁하는 사람으로 길러내기에 바빠 보인다.  


그녀의 글은 작고 소박하고 권력욕이 배제되어 있지만 옳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분명해서 좋다.  따뜻한 모성의 이유가 분명해서 좋다.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딸, 아내, 어머니)으로써 가족을 지키려는 순수한 결의가 느껴져 좋다.  


살면서 흔들리는 이유로 방황하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그 집이 나였으면 좋겠다.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박완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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