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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당신은 자동인형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차츰 발달한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에서 인간적 자유를 지향하는 두 경향의 비중이 달라진 것 같다.  개인의 자아를 약화시키는 요인들은 비중이 늘었고, 개인을 강화시키는 요인들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개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은 늘어났고, 모든 전통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더욱 확연해졌고, 개인이 경제적 성과를 이룰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중세 시대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어떻게 살지 계급과 직업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신에게 허용된 삶이 한정적이라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질서적이었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태동과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중세가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강제되었던 사회적 의무나 계급의 한계는 없어지고 굉장히 많은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지게 된다.  즉 개체의 힘이 강해졌다.



개체의 힘과 자유는 강해졌지만 개인은 어려움을 혼자서 감내해야 는 불안과 고독은 심화되었고 결국 개인들은 그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개인의 선택을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자유가 도리어 무거운 부담이  심리적 온상을 이 책을 통해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프롬은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그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상황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분석하려 했다.  그는 나치스가 독일을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들의 선조가 자유를 해 싸운 만큼 열정적으로 자유를 포기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프롬은 '인간은 자유를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려 노력하지만 자유를 얻고 난 뒤에는 자유에 내재된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된다'라고 해석했다.  문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현상은 나치즘에 빠져든 근대 독일인들에게만 관측되는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프롬은 자유가 주는 무게감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도피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또 '다른 소속을 만들거나 들어가는 것'이다.  파시즘이 강력한 예가 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사회 기반은 이미 파괴된 데다 돈이 들어갈 데는 한두 곳이 아닌데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화폐를 마구 찍어낸 탓에 경악스러운 물가상승으로 이어지고 대공항까지 닥치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독일인들은 처참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히틀러는 사회적으로 내몰린 독일인들을 전체주의 광기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개인의'사회적 성격'을 이용한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독일민족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매력적인 강령을 앞세웠고 절망과 불안에 빠진 시민들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불안한 자유를 누리던 독일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내던질 수 있게 정체성을 부여해준 것이다.  전체주의 질서 속에 스스로 들어간 개인들은 거주이전이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통제되었고 외부 세계와 단절이라는 간섭을 허용하기에 이른다.  



나치의 이념은 지배나 복종(가학-피학적)을 즐기는 나치 권력주의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켰고 개인은 노동력과 충성을 바치면 되는 윈윈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소극적 자유에 만족하는 형태는 현대의 가스라이팅에 속하는 모든 관계가 그에 해당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동인형적 순응'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그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문화적 유형이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다.  이는 현대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속박의 굴레이자 '자아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삶이기도 하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철학적 자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생각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사는 것이 불안보다는 낫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은 어쩌면 당연한 심리상태라 할 수 있다.  개인은 거대한 경제 기계의 일부이고, 치열한 경쟁관계에 시달리지만  뒤처지면 가차 없이 해고당하는 존재다.  점점 증대되는 독점 자본의 힘과의 싸움은 승산이 없는 전투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의 창의와 용기는 무력감과 절망감만 쌓여간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힘은 간접적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는 익명의 힘이고 거기에 대해 개인은 무의미한 존재일 뿐이다.



경제와 정치는 전보다 더 복잡하고 거대해진 반면, 개인이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은 전보다 더 복잡하고 줄어들었다.  개인이 직면하는 위협의 규모도 커졌다.  수백만 명의 구조적 실업으로 불안감이 증대되었다. 공적 수단으로 실업자를 지원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실업의 결과를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실업은 심리적으로 매우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고, 실업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이 생활 전반에 그늘을 드리운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대한 힘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된 자동인형적 순응은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세계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방법이다.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하면 된다.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지려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은 일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주위 환경과 비슷하게 변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현대인은 고독과 불안을 피했지만 자아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받았다.  개인의 무력감을 안겨준 자유에 대한 방향성과 자아의 회복을 프롬은 분명하게 전달한다.


우리는 자발적 활동에서 생겨나는 그 자질들만이 자아에 힘을 주고, 그리하여 자아의 본래 모습의 토대를 이룬다.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거나,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결과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보여줄 수밖에 없거나 하는 것은 열등감이나 무력감의 근원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고,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만큼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우리는 나의 정력을 어느 곳에 쏟을 때 가장 신나고 행복한가를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출세, 부모님이 원하는 성적, 멋진 차, 화려하고 많은 여행을 다니며 삶을 열심히 채우지만 어느 순간 허무함과 공허함에 봉착하게 된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보편적 추종을 프롬은 거대한 자본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적 성격'을 내면화하여 주어진 경제적, 사회적 체계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개인의 에너지를 모두 사용하며 산다고 꼬집었다.  우리는 가짜 이상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셈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평등한 능력주의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늦게나마 알아버렸다.  자본주의 체제의 오류는 이미 19세기 칼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다.  자유경쟁 자본주의는 결국 거대한 독점자본을 출현하게 만들 것이고 그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사회는 심화될 것이라 예언했고 그대로 현실이 됐다.  



노력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희망인 능력주의는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고립된 개체를 만들수록 더 많은 상품이 생산되고 팔리는 순환구조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롬이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는 결론으로 제시한 '자발적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자발적 활동은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일과 사랑이라고 명제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개개인의 선택적 방향은 다양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소유 욕망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누군가를 지배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원칙인데, 결국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대를 의미한다.  자유인의 정신은 나는 물론이고 타인 역시 존중의 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인간이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뿐이다.

책의 첫 장에 적혀있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사회가 욕망하는 욕망을 쫓기 위해 경쟁하지 말고 나 자신의 독특하고 우월한 자아의 힘을 찾아 그곳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것은 뛰어난 직업인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 과학자, 현명한 주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서도 다른 삶의 영역에서 공동의 선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본주의체제에서 유일한 희망인 민주주의의 불씨를 지켜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와 소통하고 소수 지배자가 되거나 그들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  체제에 편입하기보다 힘든 체제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인간적 유대를 맺을 수 있어야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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