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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성숙한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저서에서 프롬은 근대화와 더불어 자동인형적 순응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소극적 자유를 짚어내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을 요구했다.  그는 개인의 자발적 활동으로 창조적인 일과 사랑으로 명제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동인형적 순응으로 길들여진 개인은 이미 시장의 교환 원칙에 철저히 지배받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이용 가치에 따라 평가되는 현실인 것이다.  사람이 상품으로써 평가되어 지혜도 아름다움도 정의도 모두 '돈'으로 환산되고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생명력을 가질 뿐이다.


결국 인간관계는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의 일치를 따른다.  타인들과 함께 있지만 고독하며 분리상태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불확실성,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의 피난처로 사랑과 결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프롬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평가받지 못하고 사람의 이용가치로 평가되는 현실에 대하여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평가했다.


대인간적 '합일(合一)'을 사랑이라 명한다면 '자발적 활동'을 요구하는 프롬은 어린아이의 사랑과도 같은 미성숙한 '공서적共棲的 합일'이 아닌 성숙한 사랑을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우리는 대부분 사랑에 대해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자만한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올바른 대상만을 찾아내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믿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으려는 생산적 능력이 있어야 하며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능동적 합일을 이루려는 성숙한 사랑 이어야만이 안정과 평화 그리고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사랑의 기술'이란 이 책은 쉽게 성취할 수 있는 탐닉의 기술을 논하는 것이 아닌 성숙한 사랑의 본능을 찾아내도록 안내하고 있다.  





현대의 사랑은 성숙한 사랑을 하기 너무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자본주의 고도화로 인한 가치 교환 중심의 사회로 전락하여 공정한 거래만을 희망하는 이기적인 사랑으로써 가치 교환 중심의 상품가치로 변해 버렸다.


프롬은 자신의 퍼스낼리티(능력)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한다고 강조한다.  원론적인 사랑의 본능, 본질을 논하는 그의 글은 바로 이해하기 솔직히 어렵다.


프롬을 마지막까지 함께한 조수 '라이너 풍크'의 말을 빌리면 아래와 같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공에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 어떤 식으로 다른 사람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뇌연구와 젖먹이 연구를 통해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능동적으로 자신의 환경과 관련되어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 프롬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자기에게 낯선 힘들(사람들, 관계, 공간들, 낯선 상들)로부터의 내적 독립성이 점점 더 커지게끔 이러한 능동적인 관련성을 형성하려는 인간 내면의 근본적 경향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관련성을 '생산적'이라고 일컬었다.



즉 생산적 방향이란 의미는 합리적 사고로 시작된 상당한 자신만의 관찰과 반성, 연구로 도출된 신념의 행동이라 하겠다.  그러한 사랑은 생산적인 활동이어야 하고 주변의 그 어떤 편견, 포기, 회유에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자신만의 확신을 프롬은 '합리적 신앙'으로 견고함을 표현했다.


인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인간은 자연과 하나였고, 개인의 입장으로 봤을 때 우리는 부모님과 하나였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며 최초 분리를 경험한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분리는 아니다.  부모라는 환경의 종교와 관습을 맹목적으로 주입받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회가 속에서 길들여진 부모이기에 그들은 사회의 대표자인 동시에 중재자일 뿐이다.


인간은 부모에게서 받은 '자아도취적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통합을 찾아가는 생산적 사랑을 찾아야 한다.  프롬은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일차적인 본능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사회적 관습과 부모의 종교(환경)에 얼마나 자신의 능력이 많이 억압당하고 억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산다.  그러한 침해는 자신의 능력을 파괴하고 침해당하는 형식이 되어 무의식적인 장애물로 지배한다.  이는 또 하나의 자동인형적 순응이다.


사랑의 본질, 본성을 자각하려는 노력이 결여된 인간은 위험하다.  사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조금 어려운 책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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