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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더 귀하다

그들의 삶은 존엄하지 않아도 되는가


감기처럼 종종 찾아오는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 엄마한테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느냔 질문을 하고 답을 얻지 못했을 때 경험했던 증상과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이 병에 걸리면 우선 당장에 답을 얻지 못할 경우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물음들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리고 생각을 곱씹을수록 지독한 우울감이나 분노, 슬픔에 휩싸여 단시간 내에 대부분 소방관이 지니고 있는 쾌활하고 진취적인 성정을 상실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건데, 이를 위해 혹자는 명상이나 운동을 추천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아는 동료들 중 80퍼센트 정도는 죽음에 따른 알콜성단기기억상실증에 의존한다.





현직 소방관인 저자는 8년 차 구급대원이다.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아픔과 죽음의 경계를 마주하면서 고찰한 내용을 책에 담아냈다. 읽는 내내 현장감 있는 글의 무게감 때문인지 통증처럼 아프다.



저자가 속해있는 구급대원은 소방관 내에서도 기피하는 곳이라고 한다. 상상도 못 할 인간군상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다. 대인상대를 하는 곳은 어느 직업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동네북처럼 여기저기 호출되는 구급대원의 입장이라면 웬만한 각오 없이는 힘들 것은 충분히 상상이 된다. 그럼에도 죽음으로 종결짓고 귀소 할 때 마음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삶의 끝자락이 될지도 모르는 수많은 출동에서 저자는 삶의 종착역인 그들의 '죽음' 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근원이 되는 질문인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묻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자신에게 던진 의미를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지나간 죽음을 곱씹는 작업은 결정하기까지 힘든 결심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지탱하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었을 거라 생각도 들었다. 흔들리고 힘든 마음에 상상력이 끼어들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19 구급차를 자주 이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가난이라는 것이 피상적 판단 근거인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좌절과도 같은 피폐성에 가깝다는 의미로 읽혀서 나는 가슴이 아팠다.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최종 선택지는 주취자(술 주정뱅이), 정신질환자, 그리고 죽음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들은 왜 가난하게 되었을까.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가난은 그들 책임이 아니다.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누구나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부의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내가 가난한 것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처음부터 불공평한 라인에서 시작되며 행운이나 은총 따위는 통제 밖의 변수다. 그들의 가난은 능력주의를 추종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 위험한 논리의 희생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자살'은 선택한 죽음이란 의미에서 저자의 의견과 동일하게 나 역시 가난과는 다르게 옹호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일의 다른 나를 만들어 가는 시간은 세상 밖으로 움직일 때 기회가 오기 때문일 것이다. 슬픈 어조 속에서 '네가 죽으면 내가 너무 힘들어'라는 현실적 대목을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저자는 어느 날 깨닫는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불행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그들의 삶 깊숙이 다가가기로 결심하는 직업관을 읽는데 울컥하며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운이 좋아서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선한 배우자를 만났으며, 참으로 다행스럽게 건강한 자식들을 얻었다. 말단이나마 나랏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한참 소방조직이 몸집을 불리던 시기에 운 좋게 시험을 본 덕이었다. 여기 적은 것 중에 어느 하나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가난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몫이 되었어야 할 불행을 그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무게를 덜어주는 내 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피투(被投)된 존재라고 말했다. 스스로 존재하기로 결정해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 뜻과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현재 우리가 그들과 다른 따뜻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면 단지 운이 좋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다. 그들이 게으르고 노력이 부족하여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평등하지 못한 사회에 굴복하고 경쟁에 지쳐 세상을 마주하기 두려운 사람으로, 비참한 삶 속에 빠진 것이다.



삶에 대한 의미, 정의는 각자 해석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눈앞의 현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죽어라 팔을 휘두르는 것이라 표현했다. 몇 시간 뒤면 죽을 미치광이가 문 좀 고쳐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삶은 대단한 결론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삶에 대한 기본적 태도라 생각하고 있다. 죽음은 나를 객관화하게 만들고 나와 타인을 소중하게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라질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나의 오늘이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냄새나고 비참한 그들의 죽음을 마주할 때 속으로 마음의 짐이 줄어든다. 더 이상 부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민낯이지 사라지는 부채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동 사회를 위해 그들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복지차원의 조건적 평등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편리하게 소방대원들에게 그들을 맡기며 손쉬운 칭찬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소외된 그들의 고통을 담담히 써 내려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이 사회의 기만을 폭로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불안한 죽음 앞에서 직업인으로서 버텨내고 불안장애마저 느끼는 그에게 따뜻한 위로와 함께 슬픔을 느낀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가는 시간은 언제쯤 다가올까. 참으로 더디다.



--> 이웃 '백경'작가님의 브런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brunch.co.kr/@mobydick119



<당신이 더 귀하다 / 백경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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