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집단의 기억보다 개인의 기억이 더 정확하다


죽은 자는 우리에게 우리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죽은 자를 더 신뢰한다. 이게 괴상한가, 아니면 분별력이 있는 건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후 두 번째로 '줄리언 반스'의 책을 읽는다. 그 소설로 작가는 최고의 문학상으로 빛나는 맨부커상을 받기도 했다. 문체가 굉장히 탄탄하고 완성도가 높아서 '대박'을 외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짧은 분량의 소설이었지만 두 번을 천천히 읽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내겐 기억해야 하는 작가로 남아있다.



이번 '우연을 비켜 가지 않는다'란 소설은 여느 소설의 구성과 사뭇 달라 당황스러웠다. 소설 속에 논픽션(소설 속 화자의 산문)을 아주 세심하고 자세하게 산입 했고 그 분량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제가 관점에 대한 지적과 인간세(人間世)를 다루는 다소 민감한 종교역사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 삽입된 논픽션(산문)은 소설을 이끌고 있는 화자가 종강 후 제출하지 못했던 것의 완성분이었다. 독자는 무방비 상태에서 화자가 추적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 불린 황제의 진실을 마주한다. 소설 초반에 강의내용이 중복되기도 했고 심층 조사를 통해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과연 이 소설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점점 궁금해졌다.



이 소설은 실패한 결혼생활에서 뭔가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결핍을 느낀 삼십 대 중반의 '닐'이라는 화자가 이야기 전반을 이끌고 있다. 그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역사강의에서 자신의 삶에 큰 영감을 준 '엘리자베스 핀치(EF)'교수에게 벼락같은(닐의 표현) 매력을 느끼며 흠모하게 된다.



닐은 그녀를 스토아철학자처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로서 지적이며 절제미가 있고 고결하며 자족적인 성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인 학생들의 흔한 생각들도 흥미로운 주제로 바꿔주어 우쭐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도 있다. 그는 그녀를 '어른'으로 묘사하며 문명과 역사에 대한 통념적 강의가 아닌 사색하고 탐구하는 지성인의 자세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낀다.



닐은 그녀를 흠모하며 졸업 후에도 20년간 만남을 이어갔고 철학과 일상에 대해 정해진 규칙(75분)을 따르며 토론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고가 날아오고 그의 유품(그녀의 절판된 책 2권 포함)과 서류더미가 그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변호사의 말과 함께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반전된다.



만약 나였더라도 상당히 당황했을 상속물이다. 그녀의 자서전이라도 써야 하는 걸까. 그는 그녀가 남긴 노트를 흡사 미완성 장보기 목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노트는 구성의 원칙이랄 게 전혀 없었고 개인적 사유서부터 강의 메모까지 친밀한 것부터 공식적인 것까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던 그였기에 추적에 가까운 단서들을 찾다 방향을 잡게 되는 계기를 발견한다. 그가 쓰다가 포기한 종강자료의 소재가 그녀에게도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교자'라 낙인찍힌 '율리아누스'의 미완성 산문은 이렇게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노트에 추가로 읽을 목록까지 발견하면서 분명해진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현재의 과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때 더 긴요하다



우리는 집단적 기록물(역사라 불리는 것)에 대해 틀릴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우려를 보이지만 일종의 다윈주의로 보는 것이다. 다윈주의는 변화되는 환경에 적응한 생명체가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는 곧 '패자의 것은 승자의 것'이기도 하며 '진실은 승자에게로'라는 위험한 논리가 형성된다는 사실도 내포되어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크로체의 말이 있다. 사실은 과거이지만 역사가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사실 가운데 현대에 의미 있는 것을 취사 선택하는 기준은 역사가의 환경에 달려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거기에 또 하나 이해 집단이 조직적으로 관여될 때(일반적 규칙을 갈망하는 권력집단이라면)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망자가 거론되며 기억이 양식화로 종결될 때 표면적인 망자의 앎이란 절대적 가치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 줄 마지막 순간인 사건으로 소멸될 뿐이다.



닐은 그녀의 강의와 노트에 쓰인 미완성된 마음과 생각을 추적하며 이천 년 가까운 세월 이전에 살았던 '배교자 율리아누스'에 대한 마지막 숙제였던 글을 완성시킨다. 에세이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그는 그녀가 강의 당시 강조했던 이야기를 떠오르게 된다. 이는 독자인 우리에게 논리적인 이성의 허점을 이용하려는 오류를 주의하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시간에 속지 말고 역사 - 특히 지성인 - 가 선형적이라고 상상하지 마세요.



인간은 스토리를 좋아하기에 모든 역사는 입력과 출력이 비례관계이며 직선적 변화라 믿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핀치의 강의 내용을 빌어 중세의 기적과 순교를 모아놓은 '황금전설'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종교가 만들어낸 휘황찬란한 기적과 교훈적인 순교 뒤에 감추어진 진실에는 평범한 인간적 반응의 묵인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성 우르술라'와 동정녀만 천명의 이야기를 '경찰관을 이용한 자살'로 표현하기도 했다. 죽음을 향한 집단 욕망이기도 한 그들은 육욕의 역사라 해도 거칠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삶은 그것을 믿는 사람을 속였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조롱했다. 삶은 아무에게도 확신을 주지 못하고, 모두에게 거짓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종교, 민족집단들이 추방과 박해, 이전에는 사회적 조화가 저지른 잘못이 없었다고 말했다.



다신교의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율리아누스는 특정 종교를 박해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기독교가 수많은 특권과 소모적인 논쟁으로 제국의 힘을 빼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로마가 가진 본래의 종교적 관용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페르시아 사막에서 죽임을 당하고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의 삶을 끝낸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창백한 갈릴라인에게 졌다'라고 외친 것도 사실이라는 근거도 없다.



스토아철학자였고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며,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라 관점이다.



우리가 합리적 결정이라고 하는 것은 선과 악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닐이 완성한 '배교자 율리아누스' 산문은 출판을 미루고 서랍 속에 넣어두며 미완성으로 남기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는 소설은 개인의 확고한 선입관과 믿음이 확증편향으로 변질되어 생각의 질을 떨어트리는 것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럴 바엔 우연의 힘으로 진실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더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듯하다. 닐이 핀치의 노트에서 '율리아누스'의 진실을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매력적인 독서였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저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