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래가 지옥이 아니기를
나도 수치심 따위는 훨훨 털어 버리고 싶다. 부끄러움 따위 없는 여자가 되고 싶다. 무지한 여자가 되고 싶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조차 알지 못할 텐데.
'마가렛 애트우드'가 작가입문에 대한 강의를 담은 책(글쓰기에 대하여)을 덮자마자 서둘러 그녀의 대표작으로 우뚝 서게 한 소설을 뒤늦게 읽게 됐다. 책장을 덮고 한동안 나는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복잡 다양하게 옥죄어 와 마음을 휘저어 놓았고, 그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상상력인 최고점을 찍은 느낌이랄까. 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적 재미와 몰입감은 압도적이었다.
인간은 읽을 가치가 있고 재미있는 양질의 이야기에 환호한다. 현실 속에서 찾아낸 허구의 늪임을 알면서도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가의 문체에 열광하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완벽한 상상력과 소설의 몰입감을 이용할 줄 아는 작가다.
소설은 전체주의 사회가 여성의 자유를 어디까지 억압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에필로그(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2195년 심포지엄 학회)에 따르면 소설의 배경은 시기적으로 21세기 중반으로 짐작된다. 패권을 위한 각국의 잦은 전쟁과 환경오염 그리고 각종 성 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감하고 극심한 혼란상태를 이용해 미국의 극우 성향인 기독교 집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길리어드(Gilead)라는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새 정부는 국민들을 억압하는데 특히 여성들을 굉장히 폭력적으로 억압한다. 출생률 관리 명목으로 여성들을 여러 계급으로 분류해서 철저하게 통제하고 착취하는 데 분류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임신 가능 여부다.
여성은 4개의 계급으로 나뉜다.
- 지배층 남성의 배우자의 '아내'
- 지배층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자궁 역할을 하는 '시녀'
- 시녀들을 교육하는 레드 센터에서 그들을 통솔하고 양성하는 '아주머니'
-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 여성들은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
소설의 주인공은 '시녀'로 운명이 바뀐 '오브 프레드(Of Fred )다. Of Fred (프레드의 것)라는 말 그대로 프레드라는 사령관의 소유물이란 뜻이다. 소유물이므로 실명은 물론 어떠한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고, 지식을 얻을 수도,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오로지 사령관의 아내를 대신하는 자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길리어드 정부는 신원조회를 통해 재혼자, 미혼모, 동거녀들을 '시녀'의 분류로 분류했다. 주인공 '오프 프레드'는 동거녀였고, 레드센터(시녀 양성학교)로 보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을 못하는 지배층 남성의 배우자인 '아내'는 편안할까. 아니다. 성행위나 출산을 할 때도 지배층 아내의 배를 베고 누워 오로지 자궁의 역할을 할 뿐이다. 아내 역시 끔찍한 포즈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연출로 나는 경악을 했다. 게다가 오로지 아기를 낳아야 하는 시녀의 기회는 단 세 번뿐이다.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아기를 생산하지 못하면 독극물 처리장소(콜로니)로 끌려가게 된다. 한마디로 폐기되는 것이다.
전체주의 사상과 가부장적 권력의 사회에서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 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본다는 설정은 너무나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읽힌다. 사령관의 '시녀'가 된 화자는 삼엄한 감시 속에 수태를 강요받고 인간으로서의 인권이 억압됨에도 조용히 질서를 잡아가는 현실에 절망한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그런 삶 속에서도 인간은 적응한다는 점이다. 소소한 보상에 만족하면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 희망을 꿈꾼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의 힘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 35년 동안에도 독립을 꿈꾸는 조직이 살아 희망을 잃지 않은 것처럼 자유롭게 살기 위한 인간 본연의 투쟁은 어디든 존재한다. 주인공 '오브 프레드'는 길리어드 내부에 파견되어 첩자 역할을 했던 메이데이 일원인 '닉'에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녀는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려는 냉정한 시선의 끈을 놓지 않았고 절망의 기근처럼 텅 빈 자신을 도구가 아닌 사랑으로 채웠기 때문이라 본다.
그렇다면 소설에 나오는 지배층(사령관)은 불행하지 않았을까. 불행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억압적이고 인권이 존중되지 않은 사회 속에서 만족하는 히틀러 정권의 조종에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소설은 상상으로 빚어낸 허구의 글이지만 그 근본은 현실에 두고 있기에 오히려 현실의 부정적 진행과 맞물려 있을 때 우리는 민감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년 갱신되는 뜨거운 여름을 당황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WMO(세계기상기구)는 이미 지구는 온난화를 벗어나 '가열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심각한 재앙 수준이다. 자본주의체제가 독점한 세계는 분명 풍요로워졌음에도 폭동과 집회가 끊이지 않는 것은 부의 분배가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패권을 쥐려는 전쟁과 환경오염은 또 어떤가.
소설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 세계 속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옥의 풍경을 책에 담고 있다. 1985년에 출간된 당시보다 현재 나아졌는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지구가 인간의 이기심의 총체로 오염되어 출생을 강요받는 부분인 대목을 읽다가 놀라움에 오랫동안 정지하고 읽었던 부분을 옮긴다.
확률은 1/4이라고 센터에서 배웠다. 한때 화학 물질, 방사선, 방사능 물질로 대기가 가득 차고, 물속에는 독성이 있는 분자 화합물이 녹아들었다. 이를 청소하는데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이러한 물질들은 우리 몸으로 스며들어 지방 세포 속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바로 우리 육체가 오염되어 기름범벅이 된 해변처럼 더러워 질지 모른다. 유산은 금지. 뱃속에 든 것이 무엇이든 일단 낳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