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완성된다
모든 것이 아이들 위주가 된 삶을 살고 있어도 그 또한 기쁨이었다. 관계에 더는 시달리지 않고 작업에 목말라하지 않으며, 그저 현생을 사는 일이 좋았다. 나의 아내를 닮은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곁에서 지켜주고 도와주는 일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일이었다. 내 위치와 역할을 이토록 분명하게 깨달은 적이 없었다. 내겐 아버지란 이름의 그림자이자 결핍을 해결할 기회가 온 것이다.
미해결 과제를 풀어나가는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진실로 나를 원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밖이 아니다.
브런치란 공간은 작가들의 놀이터다. 여러 장르가 있지만 대부분 내면의 진솔한 기록들을 함께하며 울고 웃으며 서로 자극받아 성장하는 곳이다. 브런치 이웃글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장광현 작가의 글을 만났고 궁금증에 그의 에세이집을 읽게 되었다. 그는 중학교 미술교사로서의 직분과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 그리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질문들을 독자와 나누고 있었다.
그의 에세이를 읽는 내내 나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젊은 예비부부가 있다면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고 활기찬 이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직장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있고 집에는 하루도 조용히 보낼 리 만무한 혈기 왕성한 아이들이 둘이나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쉴 틈이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저자는 운동과 취미생활도 틈새에 집어넣어 즐기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삶에 불만과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찬 중학생 아이들은 강사들이 가장 꺼려하는 청중이라고 들었다. 지루한 강의는 당연하고 이십 분 이상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을 저자는 매일 닦달하며 한숨을 쉬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적당한 포기가 안위에 좋을 텐데 저자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따뜻한 선생님이다. 현실교육의 진도에 쫓길 염려가 없는 미술과목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놀라는 시간은 언제일까. 아이들의 모습에서 아내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다. 또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작은 모습의 내가 커다란 나를 걱정할 때다. 자식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저자는 자랑한다. 절대 공감한다.
내겐 토끼 같은 딸이 토끼 인형을 안고 오빠를 괴롭히다 아내에게 혼이 났다. 나는 우는 아들을 달래주고, 아내는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딸을 진지하게 혼냈다. 아들을 달래주다 두 모녀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혼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아들은 아빠에게 웃지 말라고 더 서럽게 울었다. 아내는 애 혼낼 때는 웃지 말라고 나까지 혼을 냈다. 태세를 바꿔 혼나던 딸도 합세해 아빠에게 웃지 말란다.
책을 읽으며 가정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저자는 육아에 진심이란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각오를 하며 육아에 임하려 해도 직장 내의 회식이나 친구들의 술자리 유혹은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육아는 선심 쓰듯 펼치는 이벤트가 아니라 하루도 거르면 안 되는 식사처럼 규칙적이고 의무적인 수레바퀴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따뜻한 가정에서 자란 영향이었을까. 놀랍게도 아니었다. 저자는 엄했던 아버지란 이름의 그림자이자 결핍을 해결할 과제를 밖이 아닌 집에서 찾기로 결심했다.
나 역시 성장과정에서 유년시절은 늘 불안과 함께였다. 온갖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그렇다 치고 돈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처럼 싸우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형제들은 각자의 동굴에서 부모를 이해하며 성장해야 했다. 나는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 편안하고 따뜻하고 편애하지 않는 아이들을 기르겠다고 결심했다. 폭력적이지 않고 가정적인 남편감을 골랐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고생은 있었지만 행복했다.
나조차도 나를 완전히 모르는데 오로지 나를 신처럼 의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의 미래보다 이들을 위한 삶을 살기로 한 결심이 저자에게도 겹치듯 보였다. 나의 꿈과 아이들의 육아 사이에는 우선순위만 있을 뿐 타협점이 없었다.
부모라는 인생은 아이를 키우면서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 작은 일에도 모범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신성한 의무는 책임으로 시작하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부모도 자기완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역할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뇌과학 교양서에 읽은 내용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 아기의 뇌는 양육자와 나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말한다. 즉 어린 시절 자아가 형성되는 동안 양육자가 지속적으로 들려주는 사랑의 소리는 아이의 자기 가치감의 근원이 된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보살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나는 분명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기 가치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결핍을 느끼고 억압감에 주눅이 드는 것은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부모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여러 명의 자식이 있어도 성장과정은 동일하지 않다. 당시 부모의 경제적 환경과 인식의 변화의 한계로 인해 결핍은 어느 형태로든 자식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부모의 미해결 과제를 품고 성장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된다. 미성숙했던 부모에 대한 자신의 원망도 이해하게 된다. 과거의 나를 지우고 나를 채워간다.
이웃 브런치 장광현 작가님의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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