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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굴레에서 오롯이 나로서 일어서는 삶


'차마'의 어원은 '참다'라는 말이다. '참다'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견딘다는 뜻이다. 차마 뒤에 어떤 말이 따라오든 그것을 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난처할 때 우리는 '차마'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

그렇게 '차마'에 붙들려 그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십칠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때 우울증을 앓는 남자의 아내가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리 앞의 고통은 일시적인 걸 테고 앞날은 점점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작했었다.



- 차마, 헤어질 수 없었어





이웃 브런치 '소위'작가님이 쓰신 화제의 에세이집이다. 인간관계의 굴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솔직한 감정들과 고민 그리고 그 속에서 존재감을 찾기 위해 충돌하는 내면의 질문들이 '부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모든 이야기들의 행동을 이끌던 것은 감정의 대변인인 '부사'였는데, 우리는 그녀를 통해 이제야 발견한 듯 새롭게 읽히는 경험을 한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표제(標題) 선정에 대해 신중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글을 마주하기 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맞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었다. 아니, 온통 '부사'의 세상이다.



아는 지인 중에 대화를 할 때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너~무'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녀에겐 늘 정상적이지 않는 일만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남발하는 '너무'라는 수식어가 어느 순간 듣기 싫어졌던 경험이 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어필은 잠깐은 동정을 받을 수 있지만 상황을 빌미로 책임지기 싫다는 의사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담백하고도 객관적으로(자신의 이야기조차도)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편이다.



이처럼 문장 전체를 이끌고 강조하듯 수식하는 '부사'의 역할은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을 퉁치듯 가볍게 넘기려는 사람들에게 '멈추게'하는 끌림이 있다.



누군가의 가치관이나 선악의 기준을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직접 질문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눈여겨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브런치 작가분들의 가치관을 '글'로써 느낀다. 인간의 언어는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다. 특히 글이라는 언어는 생각과 감정이라는 발자국을 남기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글을 읽으면서 울고 웃는 것은 애써 감쳐있던 나의 감정이 찔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억눌린 듯한 감정의 선 안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침착함이 안쓰러워 나는 좀 힘들었다. 거짓없이 글을 잘 쓰는 작가다.



7년여간의 국어교사로 재임한 적이 있는 저자는 모국어를 깊이 파헤칠 수 있는 감각적 환경에 친숙했다. 자신의 재능을 한껏 이용했고 담백하고도 솔직한 언어로 소통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의미를 새기던 그녀가 최종 목적지인 작가라는 직업에 안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부에 집중하고 혼자 있는 시간으로 내면을 충전하는 내향인들의 문제점은 대부분 외부의 불행을 자신의 책임과 탓으로 돌린다. 저자는 이를 '가난한 마음'으로 표현했다. 분명 자신의 책임이 아니며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님에도 자책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이 책 대부분은 '부사'가 주는 의미와 그와 결부된 저자 내면의 질문과 상황을 해석하는 과정을 핵심감정과 함께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사람의 심리는 부모라는 의존기를 통해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불안정한 부모에게 길들여진 자신의 심리적 핸디캡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자신의 행동과 사고, 정서를 지배하는 이 '핵심감정'은 성격으로 굳게 된다.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핵심감정이었던 그 과거의 기억을 다시금 재해석하는 방법은 역시 글쓰기가 최고의 처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나의 핵심감정을 처음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글쓰기를 통해 깨달았다. 여러 책들(특히 뇌과학 교양도서, 심리도서)을 읽으면서 나의 과거의 기억들을 재해석해보았고 뇌가 틀어 놨던 관점을 교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완벽하지는 않다. 지금도 뜬금없이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아파온다. 이것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울음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양손을 포개 안으며 '괜찮다'라고 다독여 준다.



저자는 반쯤 해탈한 듯 인용한 부사 '그럭저럭'를 통해 살아갈 만 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인생이란 결혼 전과 후로 완벽히 나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현실과 이상의 타협점이 결혼이며 평범의 진수를 깨닫게 해주는 것 또한 결혼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 같은 불안이 넘치는 곳을 피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경험치마저 없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미래는 꽃동산이라 말하는 아름다운 동화나 이솝우화는 결혼 전까지만 알려주고 위험하게 종결한다. 사실 결혼은 냉정히 말하자면 자신의 핸디캡을 성숙하게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내 안의 아이를 뜨겁게 안아주고 일어설 수 있도록 세상을 보여주는 시간인 것이다.



'그럭저럭'의 시간을 통과하면 우리는 비로소 '아직'의 부사를 만나게 된다. 망설이지 않고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시간이다. 일어날 수 있는 용기, 내 안의 장점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인생은 도전하며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는 결론에 스스로 도달하게 된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 소위 저>



이웃 브런치 소위 작가님의 주소입니다.

https://brunch.co.kr/@elizabeth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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