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진실은 불완전하다
이제까지 내가 쓴 것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오류는 내가 서술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생략한 것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기 기록되지 않은 것 역시 하나의 존재다. 빛의 부재처럼. 물론 너는 진실을 원한다. 너는 내가 둘과 둘을 합쳐 놓기를 바란다. 그러나 2 더하기 2가 항상 진실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2 더하기 2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2 더하기 2는 바람이다. 살아 있는 새는 이름표를 붙인 새 뼈가 아니다.
'마거릿 애트우드'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책인 '글쓰기에 대하여'를 읽고 감동받아 요 근래 뒤늦게나마 그녀의 대표 히트작품들을 연달아 읽는 시간을 가졌다. 글쓰기와 작가의 역할을 주제로 연 강의를 모아 출간했던 그 책은 작가로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복잡한 여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의에서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며, 어디에서 글을 찾는가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눈먼 암살자'란 소설이 끝나고 번역을 맡은 차은정 씨가 작품해설을 해주는데 나의 입문 계기가 된 애트우드의 캐임브리지 강의를 거론해서 놀랍고 반가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녀가 강의 시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를 관통하는 내용이다.
"애트우드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적 화술은 죽음,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과 매혹, 그리고 사자(死者)의 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들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오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만약 아직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면 작가의 진심을 놓치면 이해하기 곤란한 이 장편소설을 읽기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녀 특유의 지독하고도 복잡한 시적 은유가 넘쳤던 이 '눈먼 암살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함께 흐르는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문제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소설은 2000년에 출판되어 부커상과 해밋상(추리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소설은 화자 '아이리스'가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이제까지 은폐되고 외면당했던 자신과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이야기다. 그들을 위한 글이자 자신을 위한 기념비적 글인 셈이다.
줄거리는 특별히 복잡하지 않지만 작가가 이끌고 있는 서사 속 구조가 경계를 마구 허물고 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의 맥을 딱 잡고 가지 따라가지 않으면 견뎌내기 어려울 수 있다. 중층의 구조(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속에 공식적 역사와 보도 문서 그리고 사적 회고록이 혼합되어 운영되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간단한 필기가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줄거리를 알고 읽기를 추천한다. 그래야만 작가의 은유적 문체 속에 담겨있는 화자의 감정선을 제대로 즐기며 따라갈 수 있다. 이 한 권의 소설 속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처음엔 복잡해 보였는데 알고 나니 각각의 이야기 강물은 하나의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소설의 재미면에서 부각되는 미스터리와 반전을 작가 스스로 교차편집한 구성 속에서 집요하리만치 반복되는 은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독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세 가지 이야기 줄기가 있다. 하나는 화자인 아이리스의 회고록이다. 20세기초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 스페인 내전이 국내외 정치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서 흥망성쇠 했던 한 집안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두 번째는 아이리스가 여동생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된 소설인 '눈먼 암살자'이며, 세 번째는 그 '눈먼 암살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들려주는 공상과학소설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아이리스의 회고록을 읽지만 그 속에는 공상과학소설을 쓰기 전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이야기가 있고, 그 남자가 출간한 소설이 있는 것이다. 세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우화 같은 공상이야기와 함께 하면서 아이리스가 결과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비판과 폭로라는 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리스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동생 로라의 죽음 이후다. 애트우드 저자가 '글쓰기에 대하여'에서 밝혔던 그 이유, 글쓰기만이 구원해 주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포함한 죽은 자들의 실존과 관련하여 행해졌던 욕망과 충동의 행위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사건의 출발점은 중요하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이리스의 할아버지는 캐나다에서 단추공장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다량의 군복에 부착될 단추 수요가 늘어나 집안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의 세 아들들은 세계대전에 참전하지만 아이리스의 아버지만 한쪽 눈과 한쪽 발을 잃은 채 살아 돌아온다.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이 세계대전 참전 이후 어쩔 수 없이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 자신이 원하던 운명이 전쟁 이후 바뀐 것이다. 그리고 사업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열여덟 살의 아이리스를 서른다섯의 리처드와 정략결혼을 시킴으로써 부활을 꿈꾸게 된다. 열여덟 살의 아이리스는 할아버지가 육십여 년에 걸쳐 이룩한 노력(공장, 사업, 은행 저당권)을 내동댕이칠 만큼 용기가 없었다. 그녀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리처드'라는 인물이 얼마나 파렴치한인지 알아야 한다. 그는 순수한 사업 파트너로서 단추공장 사업을 살려준 것도, 아이리스에게 첫눈에 반해 나이차이를 극복한 결혼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사업확장할 위한 목적을 숨긴 채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또한 그는 소아성애자(小兒性愛者)로 부모를 잃은 두 딸들을 성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았다. 단추공장이 불이나고 도산 위기에 몰리게 한 배후, 그리고 흡수되는 과정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아버지의 부고소식마저 중간에서 가로채 아이리스에게 전달하지 않은 모든 악의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출세와 욕망과 권위의식만 추구한 인생을 살았고 그와 똑같은 성품의 쌍둥이 여동생 위니프리드 역시 오빠와 공범자였다.
우리는 불행을 마주하면 운명적이란 표현을 쓰며 자기 연민 속에 흐느낀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희생은 없다고 본다. 멈춘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의 삶은 순응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로라는 리처드를 두려워할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고 상황을 점검할 줄 알았고 공포를 견디며 탈출할 수 있었다. 위험을 볼 줄 알았던 것이다.
아이리스는 노동 운동가인 '알렉스'와의 밀회(외도)로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의 손아귀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쉬며 살았던 것 같다. 그녀가 어스카인 가정교사에서 배운 거짓말과 속임수를 사용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은근히 무례하게 구는 법과 말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이다. 복수는 때를 기다리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과 들키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아이리스는 로라의 명예회복을 위해, 리처드와 위니프리드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눈먼 암살자'란 소설을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한다. 리처드는 평생 쌓아 올리고 한껏 높아진 명성만큼 처제인 로라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간접 암살자로 세상에 낙인찍혀 추락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적 추락은 살 가치를 못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이리스는 안 것이다. 물론 그의 자살까지는 그녀가 예견하지는 않았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일 수 있다.
소설 속 독자들은 물론이고 소설 밖 우리들은 밀회를 즐기며 나눴던 '눈먼 암살자'의 행방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대화만 있을 뿐 소설 어디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로라의 '눈먼 암살자'는 아이리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계급사회가 휘두른 폭력으로 눈이 먼 암살자와 혀가 잘려 말할 수 없는 소녀의 탈출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아이리스의 삶이 비극인 이유다. 이는 알렉스가 아이리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냉정한 증거기도 하고 또한 당대의 남성사회가 변방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는 현실이기도 하다.
알렉스가 가치를 둔 것은 자이크론 행성과 지노어 행성의 전쟁을 빚대어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이었다. 눈먼 암살자 소설 속 돌무더기를 통해 고의적인 기억과 망각으로 되풀이되는 전쟁이라는 잔인함과 무의미함에 대하여 경고하고 싶어 했다.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두 사람(눈먼 암살자와 혀 잘린 소녀)의 행복한 미래를 얻고 싶어 하는 아이리스의 요청에 그는 '아어아 행성 이야기'를 들려주며 욕망할 것도 상처받을 것도 없는 낙원이야기는 출구가 없다는 말로 암시할 뿐이다.
처음에는 내가 단지 정의를 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내 마음이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동기가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어스카인 선생도 지적한 바와 같이, 활과 화살을 가진 에로스만이 유일한 눈먼 신은 아니다. 정의의 여신도 그렇다. 날카로운 무기를 가진 서투른 눈먼 신. 눈먼 정의의 여신이 가지고 다니는 칼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죽음을 앞두면 인간은 진실해질까. 아이리스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과 죽은 자들의 삶을 기념하고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진실이 모두 진실일까 의심하게 된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죽은 자들의 삶 속 공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지막 혈육인 손녀 '사브리나'에게 명백한 진실만은 남겨주기로 결심한다. 이른바 출생의 비밀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무리 진실일지라도 무방비상태인 손녀에게 이렇게 충격적인 고백을 남겨야 했는가는 데에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진짜 할아버지가 리처드에서 알렉스로 갑자기 바뀌는 현실적 충격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입장에서는 진실을 알리는 역사일지 몰라도 사브리나는 더러운 피를 물려받지 않은 '자유감'보다 '혼돈'으로 타락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만약 굳이 알려주어야 했다면 변호사를 통해 일정한 기간(성인)에 알려줘도 충분했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정의롭지 않으며 진실되지 않다. 잠깐의 심술이 터져 상대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우연히 괜찮은 아이템이 걸려 단추공장 부자가 되기도 한다. 책 속의 어느 문장처럼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런 악취도 풍기지 않는 그런 과거를 선호하지만 결코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애트우드가 이 소설에서 묘사한 '눈먼 암살자'는 사실 다의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매일 위태롭게 견디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쟁, 폭동, 집회, 이념갈등, 미움, 사랑, 망가진 결혼일 수 있다. 서로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눈먼 암살자는 조용히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