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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로지 주인공들의 감정에 올인한 소설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인물은 존재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급류'를 쓴 정대건 작가의 강연의 듣고 귀한 자극을 얻었다는 이웃 브런치 '지뉴'님의 글을 읽고 궁금증에 책을 들었다. 이 소설은 2022년에 출간했음에도 역주행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나는 여성 작가들이 주류인 한국 소설분야에서 젊은 남성작가의 활약이 반가웠고, 무엇이 2030 세대의 문학적 감성을 건드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소설은 간결했고 쉬운 문장만큼 시원하고 빠른 전개가 특징적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느낌이다. 소설이라기보다 영화 시나리오 대본을 읽은 기분이랄까. 예를 들면, "당장 외롭지 않게 안아야 했다." 란 간결한 문장을 접하게 되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이 감정을 듬뿍 담고 서 있는 표정이 연상되었다.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깊고 풍부한 상상력의 부재가 아쉬운 부분이다.


또 저자가 두 주인공의 감정의 성장과정에만 집중하다 보니 주변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들을 대부분 생략한 점은 너무 아쉬웠다. 예컨대 도담과 해솔의 부모가 어떤 계기로 끌렸는가, 그들의 불륜으로 인한 파멸 이후 벌어졌을 작가의 친절한 뒷이야기는 왜 없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두 주인공이 청소년기라는 특징적 시기(이때는 주관적 해석이 강할 때다)에 마주한 충격적 사건이라는 점을 이해하더라도 장편소설인만큼 저자의 분량조절이 아쉽게 느끼게 한다.



그런 불편한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사랑에 대해 집중도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집중할 필요가 없는 것은 제거하고 오로지 집중할 대상만을 집중하고 싶는 젊은 층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현대 사회는 성숙한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사회가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 고도화로 인하여 사랑마저도 교환의 상품가치가 된 듯하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불가능한 교환'의 관계에 들어서야만 성숙해진다는 점이다. 자발적 자기희생의 관계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불편했던 감정을 가만히 추적해 보니 두 아이들의 부모를 불륜으로 강제 종결한 작가의 편리성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두 부모가 살아있다면 아주 골치 아픈 대막장 드라마였겠지만 말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소설말미에 해솔이 도담에게 그날의 사건 뒷이야기를 고백하며 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목도 해솔의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연장선이었지만 나는 그 대목에서 도담의 아빠가 해솔의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감지한다. 사회적 제약상 불륜이지만 자신을 내던질 만큼이라면 나는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해석이다.



청소년기에 시작된 그들의 풋풋한 사랑은 부모의 극단적이고 불미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강제로 작별하고 사랑에 대한 각자의 죄책감으로 성장하다 재회로 서로 치유하고 성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틋하고 낭만적인 요소가 영화의 우연처럼 낭비없이 곳곳에 담겨있다. 아마 이런 부분이 젊은 층의 마음을 얻은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자기 손으로 밀치고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족의 권력을 뒤로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이 성숙한 과정은 어찌 보면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우뚝 서는 순간이다. 성숙한 사랑은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자기애가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해야 상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결단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약속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만 주저하는 도담을 향해 해솔이 말하는 대목이 나는 참 좋았다.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급류 / 정대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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