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추석연휴 그리고 사색
독서는 마음에 단지 지식의 재료들만 공급할 뿐이다. 우리가 읽은 지식들을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사색이 만들어 준다.
- 존 로크
긴 추석명절 연휴가 끝났다. 명절이 끝나니 기다렸다는 듯 가을도 떠날 채비를 한다. 명절 내내 함께 했던 선선한 공기와 빗줄기가 가을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제수용품을 구입하러 몇 번의 시장을 오갈 때만 해도 분명히 푸르른 잎사귀들이 치장하듯 풍성했던 대추나무가 이빨 빠진 노인처럼 변해 버렸다. 빗줄기 이후 힘을 잃고 떨어진 대추가 바닥에 흥건하다. 사람들은 흔해빠진 대추를 줍지 않는다.
명절을 쇠러 큰아이가 올라왔고, 큰 형님 식구들이 함께해 모처럼 북적이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살짝 흥분했던 것 같다. 기대하지 않으니 얻은 즐거움이었다. 나의 결혼선택에서 남편은 외로운 성장과정의 보상인 시골남자라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형제가 많은 사람들의 웃음과 넉넉한 음식의 소비가 주는 명절의 만족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배우자는 또 다른 모습의 나라는 사실만을 확인했고. 삶 속에서 인간에 대한 기대라는 감정을 접기로 결정했다.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구심점을 잃은 자식들은 확실한 이유를 찾은 듯 발길을 끊어 버렸다. 이제는 서운하지도 속상하지도 않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또 다른 억압이라는 진리를 확인했을 뿐이다. 홀가분한 자유마저 느낀다. 오면 좋고 안 와도 괜찮다. 대신 남편과 아이들은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다. 완전한 아군을 가진 나는 완벽하고 충분한 보상에 만족한다.
긴 연휴기간 가족들과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공원 호수 둘레길과 비 오는 한강공원을 산책했고 운 좋게 열리고 있는 뚝섬 한강공원 빛섬축제에도 가볍게 다녀왔다. 식구들과 OTT 시청도 함께 했고 아이들이 엄선해서 구매한 맛있는 와인도 마셨다. 충분히 충전되는 휴식이었다.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교수는 현대인에게 '휴식'은 뇌를 피로하게 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했다. 평상시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각성상태를 유지하며 일하는 뇌에게는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뇌에게 '휴식'은 영양을 주는 충전시간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휴가기간이 오면 열정적으로 스케줄을 짜서 뇌를 쉬지 못하게 한다.
우연히 연휴 마지막 날에 영화'소주전쟁'을 시청했다. 유해진 배우가 단지 좋아서 선택했는데 직장생활을 할 당시의 내 모습이 그에게서 비쳐 뜬금없이 눈물이 나왔다. 망해가는 회사를 지키려는 유해진 배우를 향해 이제훈 배우는 회사는 그냥 돈 버는 곳이며 인생의 가치는 스스로한테서 찾으라고 소리쳤다.
나는 유해진 배우가 생각하는 회사의 가치와 상대배우가 말하는 가치가 다름을 알고 있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게 회사는 법률이 정해준 생명체였고 지켜야 할 가치였고 유해진 배우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이성에 최종적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다행히 우리는 인생이라는 틀 안에서 이성과 이기심의 합의점에서 가치를 찾아낸다.
우리는 살면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쓰라린 체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합의든 지혜이던 절대적 가치이든 간에 '사색'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기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인생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최종적으로 안착되어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도 아니며 삶의 성찰을 피하지 않고 수용한 사람만이 겸허하고도 냉정한 세상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이다.
당신은 사색하며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