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세미 열매로 수세미 만들기

이 작은 과정에서도 얻은 깨달음





요컨대 행복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폭넓은 관심을 가질 것.

둘째,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보다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것.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 버트런드 러셀




긴 추석연휴기간 끄트머리 휴일에 가족들과 즐겨 찾는 외곽 오리구이집에 들렀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해방을 맞은 자유인이 된 기분이다. 넓은 도로와 낮은 산새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한다.



우리가 자주 가는 오리구이집은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로서 인정받은 손님들로 인해 항상 붐빈다. 오랜 시간 사랑받는 가게는 다 이유가 있다. 사장님은 카운터에만 앉아 있지 않다. 주차소리가 들리면 어느새 문 앞에 나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준다.



추석을 앞두고 오리구이 입구에 주렁주렁 열려있던 수세미 열매를 모두 수확하여 바구니에 선물처럼 담겨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눈길에 머문 우리를 향해 사장님은 기분 좋게 외치셨다.



"마음에 드는 걸로 한 두 개 가져가세요. 수세미를 만드시던지, 몽둥이로 쓰셔도 되고요."



그리하여 유쾌하게 수세미 열매 두 개를 욕심껏 들고 오게 되었다.



수세미 열매를 집어든 순간 책임이 동반한다는 사실을 차 안에서 깨닫자 나는 조금 후회를 했다. 무의식적으로 처음 해보는 작업들이란 생각이 귀찮은 마음과 함께 실패를 할 수도 있다고 인식되었던 것 같다. 처음은 낯설고 어색하고 어렵다는 불편함은 회피가 빠른 내향인처럼 베란다에 올려져 그렇게 며칠 방치되었다. 베란다를 오가며 눈에 띄는 수세미 열매가 나는 조금씩 귀찮게 느껴졌고 정말 몽둥이로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욕창에 걸린 환자처럼 밑부분이 썩는 사태를 보자 더 이상의 늦장은 통하지 않는다는 경각심이 발동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생각을 바꿔보자는 마음이 일었고 늦은 만큼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천연수세미를 만들어 보겠다는 착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노동이라는 생각에서 호기심으로 생각을 전환되니 마음이 살짝 들떴던 것 같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이든 그렇다. 베란다로 수세미 열매를 올려놓은 순간부터 나의 행동에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거다.



익숙한 것이 편한 것은 실패 없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실패와 불안을 감내해야 한다.



덜 익은 부분과 욕창처럼 썩은 속은 역시나 쓸모가 없어 과감히 잘라 버렸다. 껍질을 칼로 벗겼고 싱크대 모서리 부분을 이용해 검은 씨를 털어냈다. 하얀 씨가 있는 부분은 익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잘라 버렸다. 미련을 가지고 단단하게 붙어있는 껍질은 삶아 완벽하게 벗겨 버렸다. 그리고 뽀송해진 거친 속살을 드러낸 수세미를 가을볕에 말려 완성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세제를 묻혀 설거지를 했는데 세상에 너무나 잘 닦인다.



이것 봐! 내가 만들었어! 잘 닦인다!


식구들이 활짝 웃어준다.



나의 작은 노동으로 한동안 수세미 걱정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얻은 것은 마트에서 구입하면 쉽게 해결되는 현대의 삶 속에서 굳이 선택한 도전의 즐거움이었다. 일이라는 것은 강요받지 않으면(타인이든 자신이든) 지적 호기심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내가 해보지 않은 분야에도 선뜻 나설 수 있는 용기는 또 다른 행복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폭넓은 관심이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를 내 손으로 이루어 냈다는 즐거움은 덤이다.






거품도 잘 나고 잘 닦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