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서도 슬픈 건 어린시절에 멈춰있기 때문이다.
베냐민은 세 살이다. 어느 날 아침 엄마 아빠가 침대에 누워 그를 부른다. "이리 와서 뽀뽀해 주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에 휘감긴 채로 엄마 아빠에게 다가가, 수염 속에 묻혀 있어 찾기 어려운 아빠의 입술에 뽀뽀한다. 그다음에는 재빨리 입을 훔쳐낸다. 부모님은 곧장 그 모습을 보고는 베냐민을 야단친다. 엄마가 그를 안아 올리더니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빠한테 뽀뽀하는 게 더럽니?"
본문 中
<세 형제의 숲>을 읽고 난 뒤 여운이 크다. 형제가 많은 독자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공감하는 바가 상당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생각이라기보다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책을 읽고 나니 이제 나의 그 어떤 기억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지난 기억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나.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다. 사건을 직시하고 관찰한 사람만이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
이 소설은 엄마의 유언에 따라 유골함을 가지고 세 형제가 어린 시절 놀던 별장숲으로 가면서 시작한다. 현재의 24시간이 역행으로, 과거의 추억은 순행으로 교차되어 가며 진행되는데, 저자의 영리한 진행방식으로 소설은 긴박감이 있다.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세 형제 가족들은 오가는 사람 없는 스웨덴의 깊은 숲 속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별장에서 휴가를 보냈다. 문명이 끊긴 그곳에서 사내들은 사소한 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기도 하고, 수영시합을 하기도 하고 숲 속의 자작나무 가지를 모아 오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가족이었지만 그들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엄마는 사랑을 주는 방법에 일관성이 없었다. 아이들의 옷을 정상적으로 세탁해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서툰 육아는 세 아이의 정서불안에 큰 몫을 차지했다. 심한 중독성 술과 담배는 후에 그녀의 죽음을 부추긴 원인이 된다. 아이들의 아버지도 식탐, 술욕심이 지나쳤다. 그의 죽음도 아내와 다를 게 없었다. 이런 부모 밑에 가족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첫째 닐스, 가족의 행동을 세심히 관찰하며 사랑받을 눈치만 보는 둘째 베냐민, 솔직하고 제멋대로인 행동파 막내 피에르, 그리고 작은 개 몰리가 있다. 그녀의 성격이 주는 불안감이 잘 묘사된 대목이 있다. 키우던 개에 대한 글이다.
세상이 무서운지, 몰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듯 누군가의 품에 안겨 다니는 쪽을 선호했다. 아빠가 어색하게 따뜻함을 표현하려고 다가가도 겁을 먹고 물러났다. 닐스와 피에르도 몰리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어쩌면 엄마가 자신들보다 개를 더 아낀다는 생각에 질투를 느낀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몰리를 몹시 사랑하면서도 내킬 때만 사랑을 표현했기에 몰리는 더 불안해했다. 엄마는 몰리를 다른 가족과 공유하지 않고 독점하려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몰리에게 쌀쌀맞을 때도 있었다. 때로 베냐민은 몰리가 외톨이 같다고 생각했다. 이는 피에르와 닐스의 무관심, 아빠의 체념, 엄마가 보이는 돌연한 무관심이 낳은 결과였다.
어느 집이던 그렇다. 한 뱃속에서 나왔어도 형제간에 똑같은 성격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안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안한 정서를 내재하며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의 둘째 베냐민은 나와 비슷한 성격 같았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빨랐다. 어른들은 아이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일상적으로 거부한다. 아이들의 성격형성은 원인제공을 한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정신의학자 '아들러'는 어른이 된 후 알 수 없는 슬픔, 외로움, 괴로움의 시초인 열등감은 유아시절의 해석을 건너뛰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 형제가 동일하게 한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그 사건을 바라보는 각도는 모두 다르다.
베냐민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서도 슬픈 이유는 어린 시절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피에르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난 매일 아침 샤워하면서 휘파람을 불고 잊어"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피에르가 정말 그렇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 형제 중 그 사건을 극복하지 못한 건 베냐민 혼자뿐일 수도 있다. 요즈음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지독하게 괴로운 건 그 때문일까?
소설은 그 못났던 엄마의 유언편지로 인해 세 형제가 만나고 대화하고 화해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끝나지만 나는 아마도 저자의 희망사항일 거란 생각이 든다.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소설일 뿐이다. 하지만 나의 확신이 오해였다는 날이 언젠가 온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