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전통 뮤지컬이 있다
뮤지컬 학자 마크 스테인 Mark Steyn은 뮤지컬의 역사를 'BC and AD'로 나누었다. 여기서 'BC'는 Before Cats, 즉 <캣츠> 이전을 말한다. 'AD'는 Andrew Dominant 즉 앤드로 로이드 웨버 이후를 뜻한다. 다시 말해 <캣츠>와 그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역사와 그 이후의 역사가 나뉜다는 의미다. 그만큼 <캣츠>를 출발점으로 하는 매가 뮤지컬이 세계에 준 충격은 엄청나다.
브런치 이웃분의 신간이다. 이 분의 책은 '그 남자의 속물근성에 대하여'이후 두 번째로 마주한다. 그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표현이자 경제적 위상을 알리는 소비라는 가치에 대해 재미있게 다루고 있었다. 저자는 개인의 노력과 애정 그리고 기억을 구체화하는 물리적 애착품이라면 그것은 속물근성이 아니며 오히려 사물완상(事物玩賞)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점은 물건 하나에도 담긴 역사와 의미를 찾아내려는 집요한 호기심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25년 넘게 방송국 문화사업계 PD로 문화콘텐츠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한국 뮤지컬의 현장에 대한 역사와 현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25년 '어쩌면 해피엔딩'작품이 토니상을 수상되었을 때 아마도 저자는 걸음마를 걷던 아기가 성장해 피니쉬라인을 끊는 것을 본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
문득 그는 K-뮤지컬의 역사와 문헌의 연결고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는 업종을 다룬다 하더라도 에너지가 많이 들어갔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시작했더라도 뮤지컬의 역사와 K-뮤지컬의 역사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료와 문헌을 리뷰하고 검증까지 난해했을 거라 짐작하며 감사히 읽었다.
뮤지컬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어쩌면 저자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K-콘텐츠가 세계에서 핫하게 뜨고 있는 요즘 뮤지컬에서까지 '토니상'을 탄 이 시점에서 최소한 K-뮤지컬의 역사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나는 뮤지컬과 오페라가 비슷한 장르로 알고 있었다.
저자는 나 같은 독자의 수준을 간파라도 한 듯 뮤지컬과 오페라의 차이부터 짚어주고 시작한다. 먼저 오페라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며 고전음악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듣기에 수월하다. 오페라는 음악의 예술적 완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으며 성악적인 발성을 중점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마이크 없이 성악가의 소리의 울림만으로도 공연한다. 즉 '순수예술'로 취급된다.
반면 뮤지컬은 불특정 다수가 관객이며 다양한 예술 장르가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대중예술'로 분류된다.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무용 등 적용되지 않는 예술 분야를 찾는 게 더 어렵다. 즉 뮤지컬은 이질적인 장르들이 완전히 융합되어 있으며 연극적인 요소를 더 중점으로 두며 연출된다. 배우들은 마이크를 착용하고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은 대중적이고 친숙한 장르인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뮤지컬을 오페라와 같은 장르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대충 떠오르는 '캣츠' 나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매가 뮤지컬의 대규모 자원이 투입된 공연을 상상해 볼 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는 영화와 동급으로 해석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일단 티켓값도 대중적이지 않다.
태생부터 궁금해지는 뮤지컬에 대한 오해를 저자는 '아홉 가지 비밀'이라는 특징으로 제시한 뒤에 하나씩 풀어주고 있다. 마치 뮤지컬의 모든 역사를 한 권에 담아내려고 작심한 듯 보였다. 우리의 상식은 깊지 않아도 되며 이 정도의 흐름만 알아도 충분히 재미있게 뮤지컬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 있게 읽었던 부분은 K-뮤지컬의 인식을 깨는 방향성이라 할 수 있겠다.
나 같은 사람들은 뮤지컬의 고향이 미국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뮤지컬은 유럽에서 대중공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 성장한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준 것은 영국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이다. 미국은 자생적으로 고급문화를 창출할 만큼의 기반이 부족했다. 외지인과 이민자들끼리 융합하기도 어려웠던 초기 미국의 환경을 상상해 보라. '총. 균. 쇠'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듯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완성된 역사는 우연히 좋은 위치(지리적, 환경적 특징)로 시작되었다고 서술한다. 뉴욕항은 설탕수요에 애타하는 유럽과 서인도제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외지인들과 이민자들의 문화가 섞여 융합하기 어려웠지만 극복하고 자리한 것이다.
뮤지컬의 발전은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들어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을 극복하며 성장한 뉴욕의 역사와 함께했다. 기득권 문화가 없는 곳에 다국적 문화가 모여들었다. 힘든 현실에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을 달래줄 공연물이 필요했다. 누구나 보기 쉬운 다양한 볼거리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 관객들은 '고급예술'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 심지어 고급예술만을 고집하는 극장을 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뉴욕의 관객들은 모든 사람이 보고 즐거운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뉴욕은 다양한 문화적 기반을 가진 소비자들이 모여 있었기에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공연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자생적'이란 말은 치열한 노력 없이는 외면받는다는 소리다. 고급문화의 기반이 부족하다는 것이 오히려 다양한 공연을 흡수하려는 기초가 되었다는 의미다.
미국은 영국의 대중공연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북 뮤지컬(대본에 의한 연출)'을 만들고 미국의 향토 문화를 그려내기에 성공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오클라호마!'이며 이후 미국 문화의 정서를 지키려는 작품이 꾸준히 이어진다. 한때 타임스퀘어는 우범지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명성을 얻기 위한 캠페인과 오래된 전통의 권위를 지키려는 문화적 정서로 뮤지컬 산업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으로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시장의 역사를 되짚으며 우리나라의 뮤지컬 역사도 정리해 준다. 의외로 우리나라 역시 뮤지컬로 흥행한 역사가 있다. 1966년 정부지원을 받은 공영 극단 '예그린 악단'이다. 타이틀곡 '살짜기 옵서예'는 음반 발매까지 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민간 극단이 주도하는 자유로운 자생적 뮤지컬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제대로 된 제작 환경을 주도하기엔 역부족이었다는 아쉬움이 남는 역사로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서 저자는 뮤지컬의 특성을 상기시켜 준다.
뮤지컬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세 가지 핵심 키워드로 정리했었다. 첫째, 뮤지컬은 다양한 예술 장르가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둘째, 순수예술과 다른 대중예술이다. 셋째, 노래로 스토리를 진행시키고 감정과 상황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다.
위 뮤지컬이라는 특성에 모두 부합되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예술이 있는데 바로 악극이다. 예를 들어 신파극 '불효자는 웁니다'도 악극이니 뮤지컬에 해당되고, 개방형 원형무대로 공연하는 '마당놀이'역시 소규모 뮤지컬에 해당되는 것이다. 대본을 기반으로 다양한 예술 장르가 결합되어 서사가 펼쳐지는 대중 음악극이 바로 악극이다. 선입견을 거두면 바로 보이는 우리의 뮤지컬이다.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독재 그리고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 속에서 대중의 애환을 달래는 공연은 없었을까. 악극단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오히려 일제강점기시기였다고 말한다. 통속적 장르로 취급받아 오히려 검열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로 김태리 주연의 '정년이(2024)'이 떠오른다. 역사 속에 사라진 '여성국극'은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가 조직하여 한국전쟁 때도 그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던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딴따라'로 불리던 그들은 영화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자 전성기가 끝났을 뿐이다. '딴따라'라고 부르는 이면에는 저급하다는 평가가 내포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 덕분에 아픈 역사 속에서 시민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악극의 재해석이 남루한 옷을 벗어던지고 비단옷을 입은 것처럼 책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저자의 악극에 대한 재해석이 신선했고 왠지 모를 뿌듯한 자부심마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악극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뮤지컬은 외국에서 건너온 문화이기 때문에 고급지고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 시기를 거쳤던 예술은 저급이라 생각하는 것은 편협하다. 지우고 싶은 역사는 외면한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듯이 아픈 기억 속에서 애환을 달래며 사랑과 연대를 잊지 않도록 우리 곁을 지켜준 악극을 기억하고 소환해야 한다.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OST 중 판소리가 세계인들의 귀에 이질적으로 들리기보다 신비로운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외면하는 자세는 오히려 부끄러운 자세다.
우리에게 뮤지컬은 자생적인 대중문화가 아니라 구태 문화를 끊어낸 명품 수입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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