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해도 많은 노동자가 함께 일해 대량생산한 물건을 쓴다. 산속에서라도 밥 해 먹으려면 냄비라도 쓰게 마련이다. 사회라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부딪힌다.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입장으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주관적인 자기 세계에서 살아간다. 모두 다 다른 입장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도 그렇다. 다른 입장에서 다른 생각과 주장이 생기고 다른 주장으로 갈등이 생기게 된다. 나는 갈등이 싫었다. 갈등은 곧 싸움이라 여겼다.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고 싸운 후에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느니 나를 통제해서 나만 참으면 그게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거라 생각했다. 타협이라는 말은 뉴스에서 들은 노사협정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다. 타협은 나에겐 먼 얘기였다. 연애 때도 '밀당'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으면 당기고 싫으면 미는 거지 밀고 당기는 건 뭔가 좋다 싫었다 한단 말인가 싶었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타협이라는 단어를 약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뭔가 불의와 타협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타협'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서로 양보하여 협의'함이다. 정의자체에는 부정적 느낌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객관식 평가는 몇 가지 보기 중에 정답을 찾아내는 형식이다. 보기 중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과 '맞다, 틀리다'의 채점과정과 그에 따른 교사와 부모의 감정적 반응으로 정답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12년간 객관식평가에 노출된 한국인들은 진리는 실재하는 것이며 세상은 옮음과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세계관(객관주의 인식론)을 내재화한다.
반면, 질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쓰는 서술식 시험은 단순히 정답을 맞혔는지가 아니라, 평가자를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런 교육형식에서 자란 학생은 진리로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가 개인 내부에서 구성됨(주관주의 인식론)을 체득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이 '맞거나 틀리거나'의 문제도, 선과 악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회문제의 본질은 이익의 대립에서 발생하며 서로가 얻고자 하는 이익과 감수할 수 있는 손해를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객관적 평가형식으로 교육된 나 역시도 객관주의 인식론을 내재화했으며 타협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갈등이 필연적이고 타협이 필요함을 말이다. 타협을 좀 더 가까이에 두자. 나의 이익과 감수할 수 있는 손해를 생각해서 상대의 이익과 상대가 감수할 수 있는 손해와 조율해 보자.
또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타협이 필요할 수 있다. 나 자신과도 잘 타협하면서 살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