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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목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무리)

이응노_ 군상, 1986

by 전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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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꽃밭

너무나 길었던 더위 때문이었을까? 가을이 유독 더 반갑다. ‘가을’을 찾으면 기뻐하고, 때론 감상적으로 변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운동 가는 길에 지나치는 아울렛과 주상복합 건물 사이 공터에서 생명의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푸른 줄기가 올라오더니, 아기 손처럼 작고 푸릇푸릇 한 잎이 돋아났다. 줄기 끌에 동글동글 콩알 같은 꽃봉오리가 맺혀있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넘실대던 풀밭이 온통 화사한 꽃밭이 되었다. 뜨거운 가을 햇살을, 변덕스러운 가을바람을, 차가운 가을비를 다 이겨 낸 코스모스. 여리디 여린 줄기에 분홍빛 미소를 장착한 코스모스가 떼를 지어 춤을 춘다. 떼춤을 춘다. 바람결에 꽃향기가 스며들어 온 세상으로 퍼진다.


떼춤을 추는 코스모스처럼 까만 점과 선으로 그려진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하얀 한지는 넓은 광장이 되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걷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넓게 벌린 다리와 높이 올려 찬 발, 옆으로 펼친 팔과 높이 뻗는 손. 달리고, 뛰며 숨 가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900_1759152448759.jpg 이응노_ 군상, 1986 한지에 먹 | 167 X 266cm | 이응노미술관


이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가시처럼 생긴 사람들을 한 화면에 가득 그린 이 그림은 이응로의 <군상, 1986>이다. 한문과 서예를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응로는 초창기 수묵화, 묵죽도 등 동양화가로 활동했었다. 이후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를 하고, 종전 때 귀국했다. 1958년 55세의 나이에 프랑스로 떠난 이응로는 콜라주, 도자기,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의 추상작품을 표현했다. 수묵으로 그린 추상화처럼 동서양의 융합 작품을 만들던 그는 1964년 61세 때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수묵화와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송환된 후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중에도 도시락통, 부채, 밥풀, 간장 등 손에 잡히는 모든 재료를 사용해 회화, 조각, 판화 등 3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이후 한자와 한글 등 문자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문자추상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1979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이응노는 ‘군상’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내 그림도 변화되었어요……. 이제부터 나 자신 스스로 저 민중 속에 뛰어들어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매일매일 군중의 외침을 캔버스에 옮겨내고 있지요.”_ 이응로


민중 속에 뛰어들어 군중의 외침을 그린 그림 <군상>. 까만 먹에 붓을 적셔 그린 사람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혼자가 아닌 떼로 모여 한뜻을 외치는 사람들이다.


1997년 IMF 때 금 모으기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 2002년 광장에 모여 함께 월드컵 승리를 응원했던 사람들, 2014년 세월호 참사 추모를 위해 모인 사람들,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 정부 퇴진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유채꽃이 혼자 피나, 꼭 떼로 피지. 혼자였으면 골백번 꺾였어." _<폭싹 속았수다>


이응로는 <군상> 은 떼를 지어 핀 들꽃처럼, 함께 뜻을 모아 세상을 바꾸는 평범한 우리들의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함께 글쓰기, 함께 책 읽기 이 소소한 ‘함께’가 가진 힘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궁금해진다.




이응노 <군상>과 대조적으로 정적으로 걷는 자코메티의 <광장> 사람들.


112533707.3.jpg 알베르토 자코메티_ 광장, 1948-49

“매 순간 사람들은 무리 지어 가거나 흩어진다...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지나치거나, 여자를 쫓아가기도 한다. 한 여자가 서있고, 네 남자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여자가 있는 곳 언저리를 향해 걷는다.”

_알베르토 자코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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