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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며

by 얄미운 하마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 무턱대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림에 소질이 있거나 좋아하는 건 아니다. 어릴 때는 미술시간이 고역이었다. 그림 그리는 법을 모르는데 학교 교단에 화분이며, 과일들을 올려놓고 정물화를 그리라고 하면 참 막막했다. 밑그림은 어찌어찌 그렸다손 치더라도 물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니 다 그려놓고 보면 엉망이었다. 그렇다 보니 미술 시간이 있는 날은 미리부터 겁이 났다.


학창 시절이 끝나고부터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냥 그림 하고는 인연이 없으려니 했다. 딸들이 그림을 잘 그리고 대학에서 아트를 전공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물었다.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미술에 소질이 있냐고. 망설임 없이 '아마 남편의 숨겨진 재능인가 봐요, 저는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던 내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 졌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브런치에서 서투른 솜씨로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간다. 글을 쓰기 전에도 많이 망설였었다. 뭘 어떻게 써야 하나, 어디 가서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닌가. 어느 날,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입을 하고는 그냥 쓰기 시작했다. 아무 주제나 하나 잡고 써 내려간 글들이 서랍에 꽤 저장되어 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써보자 하고 용기를 내었다. 어차피 내 만족을 위해 쓰는 건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나 싶기도 했다. 쓰다 보면 글쓰기가 좀 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도 생겼다. 오 년, 십 년 길게 잡았다. 이제 시작했는데 성급하게 굴지 말자 다짐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글을 써 내려간다.


그림도 그렇게 시작하자.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추웠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하지 않는 날은 집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미스터 트롯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같이 책을 읽는 지인들과 가끔 안부를 묻고, 카톡을 주고받았다. 시간이 많으니 딱히 이유가 없는 불안이 몰려와 내 안을 어지럽혀 놓았다.


주어지는 시간을 어떻게 쓸까, 이렇게 외로워하며, 불안해하며 보내는 거 말고 뭐 없을까 하던 차에 다운 증후군을 가진 화가, 정은혜 씨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들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늘 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은혜작가의 모습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뜨개질을 했다. 뜨개질을 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렸다. 저거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 나의 시간을 채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꼭 뜨개질이 아니더라도, 4B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색연필로 꽃과 나무를 그리자. 나중에는 물감으로도, 아크릴로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에 서투른 솜씨지만 내가 그린 그림을 넣으면 좋겠다 하는 꿈이 생겼다.




그런 이유로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날이 따뜻해지면 연필통과 스케치북을 들고 근처 공원에 가서 그림을 그려야지. 한국의 시골길을 닮은 락커펠러 공원으로 가자. 이름 모를 들꽃들과 호수, 호수 위에 떠있는 연꽃들, 호숫가를 따라 늘어서 있는 나무들에게로 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두 가지만 있어도 나의 삶이 풍성할 것 같다. 혼자 있을 때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쓰고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누군가와 작품들을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사는데 재미를 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요즘 느낀다. 전에는 뭔가를 이루고, 성공하고, 좋은 것을 사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글을 쓰면서 누리는 기쁨을 알게 되니 나의 눈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아는 누군가는 드라이플라워로 카드를 만들면서 작은 행복을 느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을 받는 셈이다.


날이 따뜻한 봄이 오면 밖으로 나가자. 쓰고 그리자. 함께 할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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