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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by 얄미운 하마

아침에 출근해서 assignment을 확인해 보니, 트라우마 ICU의 환자이다. 담당 간호사를 확인해 보있다.


“Renee”


낯익은 이름이다. 순간 워렌이랑 바꿀까 생각했다. 지난번 온콜 할 때가 생각나서였다.




지난 일요일 아침, 온콜로 출근했다. 트라우마 ICU에서 문자기 왔다. 24/7 투석기계가 계속 알람이 울리니 기계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새로운 기계를 프라임까지 해서 가지고 갔다. 그때 담당 간호사가 르네였다. 사실 당시에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들어가자마자 연락 못 받았냐고, 24/7 투석을 잠시 홀드 하기로 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미리 연락 좀 해주지 하는 정도였다.


새로 가져간 기계를 다시 가져와야 하기도 해서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투석을 끝낸 기계에 카트리지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런저런 이유로 24/7 투석을 멈추면 혈액을 다 몸속으로 보낸 후 카트리지를 기계로부터 제거해 red bin에 버리게 되어 있다. 담당 간호사의 몫인 것이다. 바쁘지 않으면 그냥 군소리 없이 처리하는데 그날은 새 기계까지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오기도 힘들고 해서 카트리지라도 빼달라 부탁을 한 것이다.


르네는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투석을 끝낸 사람이 카트리지까지 제거하는 게 보통이라고 설명했더니 자기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ICU 간호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인데 어이없게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바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유를 대며 끝까지 안 하겠다고 하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도 적반하장으로 화까지 내면서 말이다.


일단은 다시 오겠다고 하고 그곳을 나왔다. 뭐 저런 인간이 있어? 하는 생각과 힘께 화가 올라와서 머리가 뜨거워졌다. 화를 낼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황당했다.


순간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다시 가서 ICU 매니저한테 리포트를 하며 문제를 삼을 건지, 아님 조용히 넘어갈 건지를 말이다.


르네라는 간호사를 전혀 알지도 못할뿐더러, 막 출근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을 하기도 전이었다. 유닛으로 돌아와서 화를 좀 삭이고는 다시 돌아가서 아무 말없이 문제의 기계(?)를 처리하고 가져왔다.


리포트를 하며 옥신각신하는 것이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고, 나에게 연락을 안 해 준 renal team의 책임도 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켜고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Renee”




오늘 그 여자(!)를 또 만나게 된 것이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문자로 리포트를 했다. 담당 간호사를 찾기 어려울 땐 문자로 많이들 보고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순간, 그 르네가 나타나더니 바로 옆에 있는데 무슨 문자냐고 시비를 건다. 너 거기 있는 거 몰랐다 말하고, 이제 투석 시작할 거라고 감정을 싹 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가만히 지켜보니, 다른 사람들도 르네를 껄끄러워하는 것이 보였다. 누구한테나 그런 사람이구나 싶으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다. 피곤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유 없이 화를 낼 수 있다. 그럴 때면 나중에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민나게 된다. 각자의 히스토리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결정해야 한다. 상대방이 상식 밖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할 때 나도 같이 쥐어뜯고 싸울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dignity를 지킬 건지 말이다.


물론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은 매니저를 통해 리포트를 넣어야 한다. 그렇다고 매번 그럴 수 없으니 어지간한 일들은 '그래, 니 똥 굵다'하며 지나간다.


내가 대인배라서가 아니다. 에너지도 세이브하고, 나의 일상을 좀 평화롭게 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워낙 싸움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우리 유닛에는 AI 같은 간호사가 두 명 있다. 김정을 다 집에다 놓고 오는지 무슨 일에도 감정에 변화가 없다. 출근해서 일하고 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다, AI처럼 감정이 없이 일하고 돌아가고 싶다.


은퇴를 하지 않는 이상, 일터에서 사람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없다. 동료들 뿐 아니라, 병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투석을 하기 때문에 다른 병동 사람들과도 심심치 않게 마찰이 있다. 같은 간호사들끼리 동병상련이라고 서로 기분 좋게 대해 주면 좋으련만, 분노조절장애가 있나 싶은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짬밥이 좀 되니 그런 사람들을 금방 알아차린다.


"Ooops, AI로 변신!"


내 얼굴에서 감정을 걷어내고, 사무적인 말투로 시종일관하다 보면 일이 끝나간다. 나도 사람인지라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해도 작은 스크래치 하나정도는 남는다. 그것까지 어쩌랴. 그런 것까지 월급에 포함된다 생각해야지.


리포트를 받게 되면 매니저와의 면담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우리 매니저는 내 편이지만, 일의 진상을 조사해서 윗선에 보고해야 하니 어쨌든 서로 골치가 아프다. 르네 같은 어이없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얼굴에서 뜨거운 것이 마구 올라온다. 나름대로 화를 처리하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날마다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Ooops, AI로 변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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