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병원생활을 한 지 십오 년이 넘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초기 이민생활을 지나 그럭저럭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다. 내년이면 내 나이 육십이 된다.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나 깜짝 놀란다. 사십 대 중반에 용감무쌍하게 단행한 미국 이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실행에 옮기지 않았으리라.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된 이민생활이 이십 년을 향해가고 있다. 65 세 이상되는 사람들을 위한 보험인 Medicare에서 우편물이 날아오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은퇴가 얼마나 남았죠?"
"은퇴하고 뭘 하실 건가요?"
나이가 드니 종종 듣는 질문이다. 은퇴까지는 좀 여유가 있지만 무작정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은퇴 후의 삶을 잘 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수십 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거한 은퇴 파티와 함께 은퇴 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한 일 년 정도는 일하느라 못한 여행도 가고, 그동안 소원했던 가족 친지들도 만나고, 취미 생활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다. 지루한 은퇴 후의 삶에 점점 지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보았다. 오랜 직장생활 끝에 보상처럼 다가 온 은퇴를 준비 없이 맞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잘 준비하지 않으면 나 또한 비슷한 경로를 밟게 될 것이다. 사람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으니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준비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의 두 번째 직업은 글을 쓰는 작가이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이 이제는 하루의 루틴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초보 수준이지만 시작은 다 그런 게 아닐까 하며 자투리 시간에 노트를 펴고, 컴퓨터를 켠다. 일하다가도 시간이 나면 노트에 끄적끄적 뭔가를 적는다. 일하러 갈 때마다 옆에 끼고 다니는 노트를 동료들은 궁금해한다. 뭣에 쓰는 물건인고? 숨기지 않고 얘기한다. 글쓰기 연습한다고 하면 다들 아낌없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Wonderful!"
내가 쓰고도 나중에 읽어보면 '뭔 말이야.' 하는 글들도 많다. 그래도 글쓰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걱정을 잠시 잊는다. 내가 쓰는 글이 어떻게 은퇴 후의 직업으로 연결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지금은 그저 쓰고 또 쓴다. 생각이 복잡해서 잠이 안 오면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떠돌아다니는 생각들을 붙들어 컴퓨터 화면에 앉혀 놓는다. 누군가가 밉거나 질투심이 올라오면 노트를 편다. 도대체 왜 미운건지, 왜 질투가 나는 건지 적다 보면 묘하게도 그런 감정들이 스르르 가라앉는 경험을 한다. 때로는 남편과 대판 싸우고는 복기를 하는데 글쓰기를 활용한다. A4 용지 네다섯 장을 넘기다 보면 남편을 향한 미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경험도 했다.
아직은 보잘것이 없는 나의 글을 다른 이들에게 내보일 용기는 없다. 당분간 내 글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고 그냥 쓸 작정이다. 벽을 쳐다보며 참선하듯이 혼자 쓰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어느 작가는 읽어주는 사람이 없는 혼자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편할 때라고 했다. 부담 없이 쓰고 싶은 대로 써 내려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글이 책이 되어 출판되고 독자가 생기는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간이 콩알만 한 내가 언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달이 차올라 보름달이 되듯이, 글이 차올라 흘러넘쳐 내놓을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2030년은 나의 잠정적 은퇴시기이다. 지금은 2026년을 앞두고 있다. 오 년의 기간 동안 글을 쓰는 작가로의 전환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때쯤 나올 나의 은퇴일지를 기대하며 오늘도 일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