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by 트래거

여행을 떠나려 한다.

낯선 길의 바람이

나를 부른다.


새하얀 캐리어 속에

구겨진 옷 몇 벌과

말하지 못한 마음 하나를 넣는다.


언젠가 나는

토막 나듯 부서져 떠난 적도

옷이 아닌 내가 구겨져 캐리어 속에서

웅크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 한 조각이

어딘가에 남았다.


이번에는

그 조각들을 모두 데리고

온전히 가보고 싶다.


하지만 문득,

나는 캐리어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등에 가방 하나 메고

가벼운 발로 걷고 싶었던 것이다.

캐리어의 손잡이 대신

사랑하는 이의 손이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창밖의 하늘을 볼 때면

돌아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그리워진다.

돌아온 집 한구석에선

그 마음이 캐리어처럼 조용히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캐리어를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나를 데리고 돌아오기 위해서.

언젠가 또 한 번

내 마음을 꺼내어 접고, 펴고,

다시 채워 넣을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