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의 비닐

by 트래거

쓰레기통에 비닐을 씌워 둔다

더러운 것들이 닿지 않게

.

.

.

조금이라도 청결하게 쓰려고 그러는가

코끝에 맴도는 냄새를 막아보려고 그러는가

그들은 조심스럽게 비닐을 씌우며

언젠가 버릴 날을 기약한다.


버려지는 것들이 하나둘 모여

부스러기와 음식 찌꺼기,

말라붙은 흔적들과 함께

비닐은 조용히 그 무게를 받아낸다.


가득 차면,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비닐을 묶는다.

단단히, 재빨리,

아무 감정도 없이.

또 다른 새 비닐을

갈아 끼운다

깨끗한 손으로...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 버려지는 비닐이 되었다

쓰레기들을 가득 품고,

냄새를 견디고,

흔적들을 몸에 묻히며

함께 버려지는 비닐이 되었다


쓰레기통에는

또다시 반짝이는 새 비닐이 끼워지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누군가를 위해 또다시 보호막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묶여 버려진 채,

길가 어딘가에서

내가 품었던 것들을 함께 내던져두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비닐이 되었다


한때는 보호막이었고

한때는 꼭 필요했다가

이제는 흔적만 가득한 채

버려지는 비닐이 되었다


나는 버려진 비닐이다

그러나 버려졌다는 사실만으로

나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 믿고 싶다


누군가는 나를 통해

조금 덜 더러웠고,

조금 더 안전했고,

조금은 편안했을 테니까.


오늘도

새 비닐은 바스락이며 쓰레기통을 감싼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버려진 비닐로 남아

한 생의 끝자락을 붙잡으며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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