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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케니 Jun 07. 2021

뛰는 걸 싫어하는 어린 강아지 = 과묵한 박찬호

털북숭이 가족과 함께 살아가며 생기는 흔한 오해-00

 "뛰어노는 걸 싫어하는 얌전한 어린 강아지가 있을까요?


 이 질문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쭤볼게요


 "박찬호 선수가 과묵한 날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누군가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거 같아요.


"몸이 진짜 진짜 많이 아픈 날에는 조용할 거 같요.


 물론 품종에 따라 기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어린 강아지들은 매우 활기차 뛰어놀기 좋아해요. 형제자매 강아지들과 이리저리 뛰고 구르고 이것저것 물고 뜯고, 그 작은 앞발로 무엇이든지 툭툭 건드리며 엄청난 체력과 호기심을 발산하다가 어느 순간 방전되면 떡실신하곤 하죠.

이렇게 에너지 뿜 뿜 하는 아기 강아지들이 조금 더 크면서는 '귀여움>>>>>>>곤란함'부등식이 바뀌기 시작해요. '귀여움>>곤란함'으로.(곤란한 순간들이 아무리 늘어나도 아이들의 귀여움을 쫓아오진 못하죠. 인정?

 활동 가능 반경이 증가하면서 좀 더 스펙터클한 사고가 발생하게 되죠. 4-6개월령이 되며 '뛰어오르기'와 '뛰어내리기' 기능이 탑재되는 순간, 2차원적으로 바닥 평면에서만 치던 사고가 3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입체적 공간에서 사고를 치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선비처럼 얌전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을 가족으로 맞이한 보호자분들은 이렇게 얘기하세요.

"우리 애는 어렸을 때부터 되게 얌전했어요. 저를 닮았나 보아요. 하하하." 그럴 수 있어요. 세상에 불가능은 없기에 얌전한 어린 강아지가 있을 수 있죠.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으시면 안 돼요. 아이들은 아파도 말을 못 한다는 거. 그리고 아이들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 건 보호자님 뿐이라는 거.


어린 강아지 중에 선천적 혹은 유전적인 이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어요. 심장 혈관에 중대한 기형이 있거나(선천성 심장병) 간 혈관이 일부 갈라져 나와 엉뚱한 곳으로 연결되었거나(간문맥 전신 단락증) 혹은 허벅지 뼈 일부에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뼈가 괴사 되는 질환(허혈성 대퇴골두 괴사증) 등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뛰어놀고 싶지만 호흡이 너무 가빠져서 혹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얌전 있요. 런데 이러한 상황을 당연히 보호자님은 알지 못하죠. 아이들은 말을 못 하니까요. 그래서 우린 항상 아이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와 의무가 있어요.


나의 털북숭이 가족이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혹은 비슷한 나이에 같은 품종의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특히나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선천성 심장병'은 가까운 동물병원에서 간단한 청진 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니 아직 확인해 본 적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꼭 확인해 보세요. 또한 많은 통증을 유발하는 '허혈성 대퇴골두 괴사증'의 경우 집에서도 간단히 체크해 볼 수 있어요. 아이가 똑바로 네 발로 선 상태에서 양쪽 허벅지를 동시에 만져보세요. 1살 미만인 아이에서 한쪽 뒷다리의 허벅지 근육이 유독 적다면 꼭 병원에 데려가셔서 방사선 검사를 해주세요. 한 발 스쿼트(전문 용어로 피스톨 스쿼트라 합니다. 운동 좀 배운 수의사.) 달인이 아닌 이상 양쪽 다리 근육이 차이 날 리가 없죠. '간문맥 전신 단락증'은 사실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적어서 보호자분께서 의심할 만한 증상은 딱히 없어요. 심각할 경우엔 발작을 할 수도 있지만 그 외엔 몸 크기가 조금 작다는 거 정도? 그러다 보니 대개 중성화 수술을 위해 혈액 검사를 하다 혹은 다른 검사를 하다 우연히 관찰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진료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호자 분과 나누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뭔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곤 해요. 보호자분은 '일상' 이야기를 하신 건데, 수의사인 제가 듣기엔 '일상이 아닌' 이야기인 거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얌전한 어린 강아지' 특히 '얌전한 어린 레트리버'. 이건 정말 '과묵한 박찬호 선수'와 같은 말이에요. 말이 안 돼요.

이런 여러 가지 오해들을 모아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해요. 저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눈 뒤 어느 순간 내 가족 혹은 내 지인의 가족이 오해를 받고 있다면! '아! 나 이거 어디서 읽었어! 이거 병원 가야 되는 건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이를 통해 말 못 하는 우리 털북숭이 가족이 조금이라도 덜 아파하고 더 행복해한다면 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고 이를 통해 바쁜 진료와 고된 육아 후 새벽에 글을 쓰는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을 것 같습니다.


잊지 마세요. 과묵한 박찬호는 없다는 것을.

(물론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다행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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