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까지 몇 군데의 동물 병원을 방문해 보셨나요? 첫 예방 접종부터 지금까지 주욱 한 곳의 병원만 다닌 분이 계실 거고, 털북숭이가 아픈 곳에 따라 해당 분야의 명의로 소문난 분을 찾아다니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주거지의 이동으로 어쩔 수 없이 다니던 병원을 옮긴 분도 계실 거고, 이사를 해서 좀 멀지만 어릴 적부터 계속 털북숭이를 돌보아 주었던 주치의 선생님을 찾아가시는 분도 계시겠죠.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곳의 동물 병원을 방문하게 되는 경우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게 돼요. 그중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바로 진료 기록! 현행 법상 진료 기록부를 동물 병원에 요청해도 이를 발급할 의무가 없어요. 진단서, 검안서, 증명서 또는 처방전에 대한 발급 의무는 수의사법에 기재되어 있지만 이러한 서류에는 보호자분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죠. (검안서 : 부검 소견서)
의무가 없을 뿐이지 발급해주는 것이 불법은 아니니, 개인의 역량으로 진료 기록부를 발급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진료 기록 제공을 수의사회 차원에서 금지하고 있어 개인적인 제공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이를 금지하는 이유는 동물 의료는 공공성이 인정되지 않기에 진료 기록을 통한 지적 재산권의 침해가 우려되며, 자가 진료로 인한 동물 학대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법적으로 발급 의무가 있는 서류들도 여러 한계점이 있어요. 진단서나 증명서의 경우 의무 보관 기간이 1년이기에 해당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는 역시나 발급 의무가 없으며, 처방전은 동물 병원에서 쓰는 대다수의 약이 사람용 약품인데 현행 법상 인체 약품에 대한 수의사의 처방전 발급 권한이 없기에 처방전을 통해 처방 내역을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렇기에 실제로 보호자분들이 병원을 옮길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인 과거나 현재 복용하는 약물의 상세 내역과 이전의 병력이나 수술 경력, 마취나 진료 시 주의해야 할 사항 등에 대한 정보는 얻기가 어려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 다른 병원에서 있었던 진단이나 검사 결과에 대해 보호자분께 여쭤보았을 때 잘못된 정보로 전달해주시는 경우가 많아요.
방광 결석이 있다고 하셨지만 알고 보니 담낭 결석이 있거나, 고관절 수술을 받았으나 슬개골 수술을 받았다고 잘못 기억하는 분도 계셨죠. 이전에 골절 수술한 곳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피부에서 떼어낸 종괴가 악성인지 양성인지 기억 못 하시는 분도 계세요. 아이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평소 의학 용어를 자주 접할 일이 없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이 왜곡되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진단이나 검사의 결과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이 오해하시는 부분이 바로 어떤 검사를 받았는지에요. 수술 전 검사나 건강 검진을 받게 되면 대개 혈액 검사, 방사선과 초음파 검사, 소변 검사 등 다양한 검사를 받게 돼요. 그런데 워낙 다양한 검사의 결과를 듣다 보니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어요. 간혹 건강검진 후 검사 결과를 이쁘게 출력해서 책자로 꾸며주는 병원도 있으나, 받고 나서 한 번 본 뒤로는 어디 두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죠.
게다가 사람 병원과 마찬가지로 건강 검진은 각 병원마다 프로그램이 달라요. ‘종합 혈액 검사’라고 불리는 혈액 검사 세트의 경우 대개 비슷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특수 검사의 경우 가짓수가 너무 많아 각 병원의 프로그램마다 차이가 있어요. 저도 검진 대상의 품종과 나이, 이전 병력과 현재 의심되는 질환의 유무에 따라 건강 검진 항목을 아이에 맞게 조절하여 진행해요. 따라서 건강 검진을 했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 들었다는 보호자분의 말씀만 가지고는 실제 어떤 검사를 했었는지 알 수 없어요. 게다가 가끔 건강 검진을 하면 현존하는 모든 검사를 다 받은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도 계세요.
털북숭이의 진료를 보다가, 갑상선 기능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혈액 검사를 권유드렸어요. 갑상선 농도를 체크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자 보호자분께서는 얼마 전에 집 앞 병원에서 스케일링하면서 혈액 검사를 다 했는데, 그곳 수의사 선생님이 괜찮다 했다고 하셨죠. 하지만 갑상선 농도가 건강 검진 범위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결국 해당 병원에 전화하여 건강 검진 내역을 요청하였어요. 얼마 후 그곳 수의사 선생님과의 통화를 통해 마취를 위해 간, 신장, 혈당, 혈중 단백질 및 빈혈과 염증 수치를 확인했을 뿐 추가적인 검사는 없었다는 답을 들었죠. 즉 이 아이는 건강검진을 한 게 아니라 일부 혈액 검사만을 했을 뿐이었어요.
또 한 번은 멀리 이사 가는 바람에 병원을 옮기게 되신 보호자분께 전화가 왔어요. 지금 아이 상태가 안 좋아서 근처 병원을 왔는데 이전에 한 혈액검사 기록을 달라고 요청하셨죠. 하지만 저희 병원에서는 그 아이의 혈액 검사를 한 적이 없었어요. 몇 개월 전에 아이가 구토 설사해서 저희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했는데 왜 기록이 없냐고 따지셨지만 그때는 방사선과 초음파 검사만 했을 뿐 혈액 검사는 실시하지 않았다고 답변드렸어요.
실제로 대다수의 분들은 이전에 진행한 털북숭이의 혈액 검사 내역을 잘 기억하지 못하세요. 그러니 되도록이면 결과는 이메일로 미리 받아두세요. 아니면 핸드폰으로 검사 화면을 찍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나중에 다른 병원에서 수의사 선생님이 요청해도 바로 보내줄 수 있고, 어디다 뒀는지 잊어버릴 일도 없죠. 게다가 털북숭이가 언제 어떻게 아프게 될지 모르니까 미리 챙겨두는 것이 좋아요.
만약 검사 자료가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전 병원에 전화해서 검사 기록을 요청해야 돼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보호자분들이 이를 굉장히 꺼려하세요. 다른 병원에 방문하였으니 이전 기록을 내어달라는 요청이 무례한 혹은 매너 없는 행동으로 보일까 봐 주저하시죠. 게다가 용기 내어 자료를 요청해도 대개 바로 받기 힘들어요. 해당 병원의 사정에 따라 몇 시간, 심지어는 주치의 부재나 병원의 휴무로 하루 이틀 걸릴 수도 있어요. 간혹 검사 자료 자체를 보호자분에게 제공하지 않는 병원도 있어요. 그래서 이전 검사 내역 신경 쓰지 말고 다시 저희 병원에서 검사를 요청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치의 변동이 있을 수 있기에 새로 검사를 하는 게 더 정확해요. 하지만 당일의 수치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추세예요. 과거 자료와 비교하여 시간에 따른 수치의 변화를 알면 병의 진행 속도를 알 수 있기에 예후를 평가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전 검사 기록을 알면 불필요한 중복 검사를 줄여서 털북숭이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보호자분의 은행 잔고를 보호할 수 있어요. 또한 질병이 진행되는 추세를 파악하여 병의 진행 속도를 짐작하게 해 줘요. 이를 통해 치료의 강도를 결정하고 예후를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죠. 그러니 조금 번거롭더라도 검사 후 기록을 잘 보관해두시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예요. 지금이라도 아이의 검사 기록을 받아둘 수 있다면 미리 챙겨두는 것이 어떨까요?
p.s.
보호자분에게 검사 기록을 보여드리거나 내어드릴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수치에 대한 집착이에요. 혈액 검사 수치는 당일의 식사 여부나 탈수 정도, 다른 질환의 유무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렇기에 한 번의 검사 결과보다는 아이의 컨디션 변화와 수 차례에 걸린 검사 결과의 추세가 중요하죠. 하지만 보호자분은 이러한 사실보다는 눈에 바로 보이는 수치에 집착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치료를 시작한 다음날 수치 개선이 없다는 이유로 불안해하시는 경우도 있죠. 물론 혈액 검사 결과를 통해 진단과 치료 반응을 보는 건 맞지만, 전적으로 이에 의지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수치에 집착하지 마세요. 혈액 검사 수치 이외에도 여러 요소들을 종합하여 당신의 털북숭이 주치의 선생님이 적합한 판단을 내려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