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가강: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영혼이다

by 이헌철

러시아인들은 볼가강을 ‘볼가-마투쉬카(Volga-Matushka)’라고 부른다. 마투쉬카는 ‘어머니’를 뜻하는 친근한 말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부를 때,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쓰는 그런 다정한 호칭이다. 그런데 왜 강을 어머니라고 부를까?

1839년 영국 여행자 로버트 브렘너가 볼가강을 보고 이렇게 썼다. "이 강이 없다면 러시아인들은 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절반이 볼가강 하류의 단 한 구역, 아스트라한 근처에서 나왔다. 강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하지만 볼가강이 어머니인 이유는 단순히 물고기 때문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긴 이 강은 3,530킬로미터를 흐르며 러시아의 심장부를 가로지른다. 발다이 구릉에서 시작해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동안, 이 강은 숲과 초원, 그리고 사막을 지난다. 러시아 인구의 40% 이상이 이 강 유역에 산다. 모스크바, 카잔, 볼고그라드, 사마라...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이 모두 이 강변에 있다.

강은 사람들을 연결했다. 바이킹 시대부터 볼가강은 스칸디나비아와 페르시아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로였다.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바이킹들은 이 강을 따라 모피와 꿀과 노예와 향신료를 실어 날랐다. 강을 따라 사람들이 모였고, 도시가 생겼고, 문명이 번성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이 강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이 강이 러시아를 품었기 때문이다. 2019년 한 러시아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볼가강이 없었다면 러시아도 없었을 것이다.”

image.png 볼가강, Ⓒnamu.wiki

문학 속으로 흐르는 강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는 볼가강변의 코스트로마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다. 그의 희곡 『뇌우』와 『지참금 없는 결혼』은 모두 볼가강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뇌우』의 여주인공 카테리나는 볼가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억압적인 시댁 생활을 견디지 못한 그녀에게 강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막심 고리키는 볼가강변의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서전 『나의 대학』은 볼가강을 오가는 배에서 일하던 청년 시절을 그린다. 고리키에게 볼가강은 교육의 장소였다. 배에서 만난 선원들, 승객들, 노동자들이 그의 진짜 선생님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볼가강은 나의 대학이었다.”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러시아 여성들』에서 볼가강을 ‘신음하는 강’이라고 불렀다. “볼가로 나가라, 거대한 러시아의 강 위로 / 누구의 신음소리가 들리는가?” 그 신음은 부를라키(볼가강의 바지선을 끄는 사람들)의 노래였고, 동시에 러시아 민중의 고통이었다.

그런데 볼가강은 단순히 고통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를 찬양하는 송가들은 볼가강을 “길들여진” 강으로 묘사했다. 위대한 여제가 야생의 강을 제국의 동맥으로 길들였다는 것이다. 19세기에는 낭만주의 시인들이 볼가강의 ‘우울한 장엄함’을 노래했다. 같은 강이 누구에게는 고통이고, 누구에게는 권력이고, 누구에게는 아름다움이었다.

20세기 작가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썼다. “거리에서 거리로 / 우리는 초원을 건넜네 / 볼가 너머 초원에서 / 당신은 급히 참호를 팠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볼가강은 소련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전설적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볼가 너머 땅이 없다.” 강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볼가강은 이렇게 러시아 문학 속을 흐른다. 12세기 『이고르 원정기』부터 21세기 힙합까지, 모든 시대의 러시아 예술가들이 이 강을 노래했다. 강은 변하지 않았지만, 강을 보는 눈은 시대마다 달랐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이 쌓여서, 볼가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라 러시아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다.


강이 나눈 것, 강이 이은 것

16세기 중반, 이반 뇌제가 카잔과 아스트라한을 정복하기 전까지, 볼가강은 국경이었다. 강 서쪽은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인들의 땅이었고, 강 동쪽은 이슬람을 믿는 타타르인들의 땅이었다. 강은 두 세계를 나누는 경계였다. 하지만 정복 이후, 강은 오히려 연결고리가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다민족, 다종교 국가가 되었고, 볼가강은 그 다양성의 중심이었다. 카잔에 가면 정교회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나란히 서 있다. 볼가 유역에는 러시아인, 타타르인, 바쉬키르인, 마리인, 추바시인 등 수십 개 민족이 함께 산다.

역사학자 재닛 하틀리는 그녀의 책 『볼가: 러시아 최대 강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볼가강변의 정착지들은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국가의 민족적·문화적 복잡성의 축소판이었다.” 강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섞이는 문화적 공간이었다. 17~18세기, 볼가강은 반란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670년 코사크 스텐카 라진이 볼가강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을 이끌고 차르의 군대와 싸웠다. 비록 진압되었지만, 스텐카 라진은 민중 영웅이 되었다. 작곡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는 그의 이름을 딴 교향시 『스텐카 라진』을 작곡했고, 그 주제 선율로 《볼가의 뱃노래》를 사용했다.

1918년 러시아 내전 때도,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도, 볼가강은 전쟁의 중심이었다. 누가 강을 장악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다. 백군과 적군이, 독일군과 소련군이 이 강을 놓고 싸웠다. 강은 방어선이었고, 보급로였고, 상징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강은 다시 삶의 공간이 되었다.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고, 아이들이 물에서 수영하고, 여행자들이 유람선을 탔다. 강은 나누기도 하고 잇기도 하면서, 계속 흘렀다.

강이 가르치는 것

볼가강의 이름은 슬라브어 고어의 ‘습기, 수분'을 뜻하는 ‘vòlga’ 라는 단어에서 왔다. 흥미롭게도 스키타이인들은 이 강을 '라하(Rahā)'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습기'를 의미했다.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 강을 ‘젖은 것’, ‘촉촉한 것’으로 인식했다. 건조한 초원에 생명을 주는 물줄기였다는 의미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이 강을 ‘볼가-마투쉬카’, 즉 ‘어머니 볼가’라고 부른다. 습기나 수분이 아니라, 어머니로 이름이 바뀐 것은 강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강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삶을 주고 키우는 존재가 되었다.

강은 흐른다. 3,530킬로미터를 흐르는 동안 강은 변한다. 좁았다 넓어지고, 빨랐다 느려지고, 얼었다 녹는다. 하지만 강은 계속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어떤 댐도, 어떤 전쟁도, 어떤 오염도 강의 흐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러시아인들이 배운 것이 바로 삶도 강처럼 흐른다는 것이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얼어붙는다. 하지만 결국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오늘날 볼가강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풍경을 만난다. 야로슬라블에서는 중세의 나무 교회들을 보고,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거대한 무역 박람회장을 본다. 카잔에서는 정교회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볼고그라드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기념비를 보고, 아스트라한에서는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광활한 삼각주를 본다. 하지만 강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볼가강은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삶이다. 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도 있고,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도 있다. 강변에서 산책하는 노인과 물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볼가강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이는, 너무나 당연한 존재다.

그리고 강은 여전히 흐른다. 발다이 구릉의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수백 개의 지류를 모으고, 수십 개의 도시를 지나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삶을 스치고, 마침내 카스피해로 흘러든다.

볼가강은 천 년 전에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고, 천 년 후에도 흐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짧지만, 강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 영원함 속에서 우리는 강변에 발자국을 남기고, 강물에 얼굴을 비추고, 강 소리를 들으며 잠시 머물다 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강의 일부가 되고, 강이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볼가강이 러시아인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을 가르져 준다.

keyword
화, 수, 금, 토 연재
이전 03화러시아의 사계절과 삶: 극한이 빚어낸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