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 붙은 땅:
시베리아 유배가 남긴 유산

by 이헌철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들어서는 경계에 하나의 기둥이 서 있었다. 죄수들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면 유럽 러시아가 보였다. 고향, 그리고 가족이 지나온 삶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앞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지옥, 시베리아가 펼쳐졌다.

1885년 미국 기자 조지 케넌이 이 기둥 앞에 섰을 때, 그는 숲 사이로 유령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썼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이곳을 지나간 죄수들의 울음이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에 도착하는 사람 중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과 추위와, 굶주림과 강제 노동이 그들을 집어 삼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케넌은 처음 시베리아로 떠날 때 러시아의 유배 제도를 옹호하려 했다. 유럽의 감옥보다 나은 합리적인 제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베리아를 8천 마일이나 여행하고, 수십 개의 감옥을 방문하고, 백 명이 넘는 유배자들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1891년 그가 쓴 『시베리아와 유배 제도(Siberia and the Exile System』는 차르 정권의 잔혹함을 폭로한 최초의 국제적 고발서가 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통의 기록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 정신의 불굴함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땅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지켰으며, 무엇을 발견했는지, 그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유배와 처벌의 공간: 카토르가에서 굴라그까지

시베리아의 광활함은 오랫동안 유배와 처벌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7세기 차르 알렉세이 시대부터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를 ‘카토르가’라 불리는 강제노동형 제도의 유배지로 사용했다. 카토르가는 단순한 감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수들을 국가의 노동력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시베리아 개척의 수단으로 삼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 제도였다. 1753년 사형제가 폐지되면서 본래 사형에 처해졌을 중죄인들도 카토르가로 보내졌고, 1847년 형법 개정 이후에는 민족 봉기 참가자들,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까지 대거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연간 수만 명이 시베리아로 이송되었다.

1891년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사할린 섬의 유배지를 방문하고 그곳의 참상을 기록했다. 그는 죄수들이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적절한 도구도 없이 나무를 베고,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목격했다. 체호프의 『사할린 섬(Sakhalin Island)』은 유배 제도의 비인간성을 낱낱이 폭로했다.

시베리아 치타의 데카브리스트 거주지 /위키피디아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혁명 이후의 지옥: 굴라그의 탄생

1917년 혁명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레닌은 1918년 혁명 직후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특별 수용소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것이 1930년 ‘굴라그’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되었다. 굴라그는 '교정노동수용소 본부'의 러시아어 약자로, 처음에는 단순히 행정 기관의 이름이었지만 곧 소련의 전체 강제노동수용소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스탈린이 1924년 권력을 잡으면서 굴라그는 급격히 팽창했다. 스탈린은 굴라그를 두 가지 목적으로 활용했다. 첫째는 정치적 반대자 제거였고, 둘째는 소련의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무료 노동력 확보였다.

1930년대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부농으로 분류된 수백만 명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이어진 대숙청 시기에는 공산당 간부, 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등이 대거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다.

굴라그 시스템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성기에는 최소 476개의 수용소 네트워크가 있었고, 각 네트워크는 수백에서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를 포함했다. 수용소들은 주로 시베리아와 북극 지역의 황무지에 위치했다. 1929년부터 1953년까지 약 1,800만 명이 굴라그를 거쳐 갔고, 그중 최소 160만 명에서 최대 200만 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굴라그 수용자들의 삶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14시간의 강제 노동,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혹한, 턱없이 부족한 식량 배급의 상황이었다. 백해-발트해 운하 건설에는 10만 명 이상의 죄수가 투입되어, 원시적인 곡괭이와 삽으로 20개월 만에 227Km의 운하를 팠다. 적절한 장비도 없이 얼어붙은 땅을 파고, 맨손으로 바위를 나르던 이들 중 수만 명이 영양실조와 과로로 목숨을 잃었다.

콜리마는 굴라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거주지로 알려진 이곳은 ‘12개월이 겨울이고 나머지가 여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콜리마 금광에서 죄수들은 얼어붙은 영구 동토층을 파내며 금을 캤고, 많은 이들이 규폐증(Silicosis)과 동상으로 고통받다 죽어갔다.


신앙의 시험: 눈 속에 묻힌 믿음

유배 제도의 가장 잔혹한 측면 중 하나는 종교 박해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러시아 정교회는 표적이 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불렀다. 신은 없으며, 교회는 인민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박해는 즉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다. 수도원은 마구간과 창고로 변하고, 교회는 공장과 감옥으로 바뀌었다. 성인들의 유골은 거리로 끌려 나와 조롱당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23년 말까지 2,700명의 정교회 사제, 3,400명의 수녀, 2,000명의 수도사가 살해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박해로 600명의 주교, 4만 명의 사제, 12만 명의 수도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추정도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1920년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에 최초의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한때 정교회 수도원이었다. 그 거룩했던 공간은 ‘특수 목적 수용소’가 되었다. 가장 먼저 보내진 사람들이 바로 정교회 사제들이었다.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시베리아의 수용소는 지옥이었다. 영하 40-50도를 오가는 추위 속에서 최소한의 옷만 입고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해야 했다. 식사는 검은 빵 조각과 묽은 죽이 전부였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추위로, 병으로 죽어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제들은 그곳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물론 공개적으로는 불가능했다. 들키면 즉각 처형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했다. 막사 구석에서, 광산의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숲속에서 예배를 드렸다. 빵도 포도주도 없었다. 성경책도 기도서도 없었다.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외워서 기도했다. 수십 년 동안 외운 예배문을 기억 속에서 꺼내 나지막이 암송했다. 나무 조각에 성호를 그어 십자가를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얻은 빵 한 조각을 나눠 먹으며 성찬식을 재현했다. 정교회의 예배는 원래 화려하고 장엄하다. 금빛 제의, 향 연기, 성가대의 합창, 이콘으로 빛나는 교회당이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믿음뿐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예배를 계속 살아 있게 했다.


유배가 남긴 문학

시베리아 유배는 러시아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대 앞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 감형되었다.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을 마친 후, 그는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다. 그의 가장 위대한 소설들―『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모두 시베리아 경험에서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유배지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면과 가장 고귀한 면을 동시에 목격했다. 그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진실을 보았고,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유배의 고통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깊이를 탐구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굴라그에서 10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수용소 군도』를 위한 증언들을 모았다. 그의 책은 소비에트 체제의 잔혹함을 전 세계에 알렸고, 결국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솔제니친은 말했다. “작가의 임무는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죄와 벌>1867년 출판본 제목 페이지

시베리아 유배는 또한 놀라운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 어떤 사제는 수용소에서 성경 전체를 암송했다. 그는 매일 밤 머릿속으로 한 구절씩 반복하며 외웠다. 그렇게 수 년을 보낸 후,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말했다. “감옥이 나를 성경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역설적 전환: 유배지에서 개척지로

그러나 시베리아의 이야기는 고통만이 아니다. 시베리아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이들의 개척지이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정부는 농민들에게 시베리아 이주를 장려했고, 수백만 명이 새로운 삶을 찾아 이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시를 세우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개척자들에게 광활함은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끝없는 땅은 새로운 기회를 의미했고, 미개척 자원은 부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시베리아의 석유, 천연가스, 다이아몬드, 금은 20세기 러시아 경제의 근간이 되었다.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같은 도시들이 타이가 숲 한가운데 세워졌고, 수백만 명이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궜다.

이러한 변화는 시베리아의 광활함이 갖는 의미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유배자들에게 광활함은 고립과 절망의 의미였다. 문명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끝없는 땅은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었다. 그러나 개척자들에게는 같은 광활함이 자유와 가능성을 의미했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관계 맺느냐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유배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첫째, 그것은 인간 정신의 불굴함을 보여준다.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도, 굶주림으로 몸이 비틀거려도, 사람들은 인간으로 남았다.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인간이 되었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면만이 아니다. 동시에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 그리고 희망도 드러난다.

둘째, 그것은 권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스탈린은 교회를 파괴하려 했다. 수만 명의 사제를 죽이고, 수만 개의 교회를 폐쇄했다. 그러나 결국 교회는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믿음은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폭력도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믿음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셋째, 그것은 기억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오늘날 시베리아의 옛 수용소 터를 방문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녹슨 철조망, 무너진 건물의 잔해, 이름 없는 무덤들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곳에는 작은 십자가들이 서 있다. 누군가 세운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러시아인들은 이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네째 그것은 겸손을 가르친다. 시베리아의 광활함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타이가의 끝없는 숲과 시베리아의 거대한 공간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한계를 드러낸다. 현대 도시에서 우리는 인간이 설계하고 통제하는 환경에 익숙해졌지만, 시베리아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 주는 질문

정교회 사제 알렉산드르 멘은 1990년 살해당했다. 소비에트 통치하에서 죽은 마지막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박해 속에서 더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박해는 진짜 신자와 가짜 신자를 구분하니까요.”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얼어붙은 광산에서, 눈 덮인 유배지에서 살아남은 사제들이 증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진짜였다. 건물을 잃어도, 재산을 잃어도, 자유를 잃어도,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존엄하다는 확신이었다. 한국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종교의 자유를 당연하게 여긴다.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경전을 읽고, 모여서 예배하고, 신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불과 7-80년 전, 지구 어딘가에서는 기도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아니 지금도 북한에는 믿는 자의 죽음이 현실이 되고 있다. 시베리아의 눈 속에 묻힌 사제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잃어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시베리아는 여전히 유배와 개척이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고립과 혹한의 땅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도전과 기회의 공간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시베리아 광활함이 갖는 의미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광활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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