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람들의 술 문화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한국의 술자리는 누군가 술잔을 높이 들며 외친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모두가 “위하여!”를 따라 외치며 잔을 부딪친다. 모스크바의 술자리에서 러시아인들도 똑같이 술잔을 든다. “За нашу дружбу!(자 나슈 드루주부!)/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놀랍지 않은가? 한국이나 러시아나 “~을 위하여”로 건배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러시아인은 술잔을 든 채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5년 전 겨울이었지. 그때 너는...” 3분, 5분, 이야기가 이어진다. 테이블의 모든 사람이 조용히 듣는다. 누구도 먹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그제야 잔을 부딪친다. 한국과 러시아가 술을 마실 때 하는 건배사는 같은 형식이지만 깊이가 다르다. 우리의 “위하여”는 선언이지만, 러시아의 “За”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첫 잔 후엔 빵 냄새만
러시아 속담: “첫 번째와 두 번째 잔 사이에 긴 휴식은 없다.” 첫 잔을 비운 후, 러시아인들은 안주를 먹지 않는다. 검은 빵 냄새만 맡는다. 보드카의 알싸함을 빵 향으로 중화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잔을 비운 후에야 피클, 청어, 절인 오이를 먹기 시작한다.
건배사의 순서도 정해져 있다:
• 1번째: 오늘의 주인공을 위하여
• 2번째: 부모님을 위하여
• 3번째: “바다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세 번째가 특별하다. ‘바다에 있는 이들’이란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뜻한다. 이때는 잔을 부딪치지 않는다. 모두가 조용히 잔을 들고, 소리 없이 마신다. 죽음에 대한 존중이다.
타마다: 건배사의 예술가
조지아에는 ‘타마다’라는 존재가 있다. 건배사를 이끄는 사회자다. 한국의 결혼식 사회자와 비슷하다고? 아니다. 타마다는 시인이고 철학자이며 코미디언이다. 조지아의 한 결혼식에는 타마다가 일어서면 잔치상이 조용해진다.
“한 남자가 현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친구는 쉽게 적이 되는데, 적을 다시 친구로 만들기는 어렵습니까?’ 현자가 대답했죠. ‘집을 짓는 것보다 부수는 게 쉽고, 항아리를 만드는 것보다 깨는 게 쉬우며,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게 쉽기 때문이네.’ 그러니 좋은 것을 만들고 파괴하지 않기 위하여!”
참석자들은 숨죽이며 듣는다. 건배사 도중에 먹거나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타마다가 “알라베르디!”를 외치면, 지명된 손님이 일어나 마치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그 이야기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다. 조지아의 전통 잔치 ‘수프라’는 5시간에서 12시간까지 이어진다. 수프라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음식, 와인, 노래, 건배사가 어우러진 문화적 행사다. 15분마다 새로운 건배사가 제안된다. 러시아도 이 전통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결혼식에서는 손님들이 갑자기 “고르코! 고르코!(Горько!)”를 외친다. ‘쓰다!’는 뜻이다. 무엇이 쓰다는 걸까? 테이블 위의 음식이다. 그 쓴맛을 달게 만들 방법은 단 하나이다. 신랑 신부가 길고 달콤한 키스를 하는 것이다. 손님들은 키스하는 동안 초를 센다. “하나, 둘, 셋...” 한국의 “키스! 키스!”와 비슷하지만 메시지는 더 깊다. 삶은 원래 쓰다. 하지만 사랑으로 달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위하여’ 뒤에 오는 이야기
한국에서는 “건강을 위하여!”라고 하고, 러시아에서도 “За здоровье!(자 즈드로비예!)” - 건강을 위하여! 라고 한다. 형식은 같다. "За (자)" + "~을 위하여". 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묻는다. “왜 건강을 위해 마시나요?” 그리고 답한다. 할머니의 건강, 친구의 회복, 우리 모두의 건강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러시아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술잔을 들지 않는다. 보드카는 일상의 음료가 아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건배사가 항상 길 필요는 없다. 친한 친구들끼리는 “부젬(Будем)” 한 단어면 충분하다. “우리는 존재할 것이다, 우리 함께 살아가자”라는 뜻이다. 짧지만 그 안에 “우리가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것”,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이라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요즘 한국 술자리는 많이 달라졌다. 억지 술은 사라지고,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는다. 좋은 변화다. 하지만 러시아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놓친 게 있지 않을까? 바로 경청의 시간이다. 타마다가 건배사를 할 때, 모든 사람이 침묵한다. 누군가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이다. 요즘 우리는 술자리에서 누군가 “위하여!”를 외칠 때, 우리는 정말 누군가의 마음의 말을 듣고 있을까?
러시아인들은 건배사로 '왜 우리가 여기 있는가'를 상기시킨다. 단순히 마시는 게 아니라, 관계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시간이다. 우리의 “위하여”는 선언이다. 러시아의 “За”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둘 다 필요하지 않을까? 때로는 짧은 선언으로, 때로는 긴 이야기로 술잔을 드는 문화가 필요한 것 같다.
다음 술자리에서
“위하여!”를 외치기 전에 잠시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여기 모였을까? 함께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러시아인들처럼 10분씩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마디라도 진심을 담아보는 건 어떨까.
“힘든 시기에 함께해줘서 고마워.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내년에도 건강하게 만나자.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는 이미 “위하여”라는 아름다운 말을 가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건 그 뒤에 오는 한 문장의 진심이다. 술자리는 그저 술을 마시는 시간이 아니라, 관계를 확인하고 의미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위하여!”라는 한마디에 담을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러시아인들은 꺼내 보여준다.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