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0도가 아니면 춥지 않고, 알코올 도수 40도 이하는 술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이 말 속에는 그들의 삶이 녹아 있다. 하지만 러시아 술 문화의 진짜 이야기는 40도 보드카에만 있지 않다. 흑빵으로 만든 크바스, 꿀로 빚은 메도부하, 그리고 “말 없이는 술잔을 들 수 없다”는 건배(토스트) 문화까지, 700년 역사의 보드카 뒤에 숨겨진 러시아인들의 진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술 문화의 본질이 보인다.
감옥에서 탄생한 전설: 보드카의 기원
1430년대, 이탈리아에서 증류 기술을 배운 괴짜 수도사 이시도르가 러시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지 못하고 감옥에 갇혔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몰래 보드카를 증류해 간부들을 취하게 만든 뒤 탈출했다. 그가 남긴 증류기 덕분에 러시아 전역에 보드카가 퍼졌다는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스토리텔링에 가깝지만, 이 전설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보드카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었다는 점이다. 감옥에서도,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소련의 금주령 아래에서도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만들어 마셨다.
1894년, 놀랍게도 주기율표로 유명한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보드카의 공식 도수를 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40도가 몸에 가장 잘 흡수되며 해도 적고 최상의 술맛을 낸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과학자가 국가의 술 도수를 정한다는 발상 자체가 러시아답다. 하지만 실제로는 멘델레예프가 보드카의 도수를 정한 적이 없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40도가 공식화된 것은 1894년이 아니라 1843년이다. 당시 러시아 정부가 주류세 징수를 편하게 하기 위해(측정의 정밀도를 위해) 도수를 40도로 표준화한 것이며, 당시 멘델레예프는 겨우 9살이었다. 이 전설은 1894년 보드카 전매제가 시행될 무렵, 멘델레예프가 주류 위원회에 참여했던 사실이 와전되거나 이후 보드카 브랜드들이 마케팅을 위해 활용하면서 굳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보드카는 국가 세수의 핵심이었다. 화폐가 부족한 시기에는 보드카가 화폐 역할을 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고가의 대체 통화였다. 러시아 정부는 보드카로 돈을 벌었고, 러시아인들은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렀다.
빵이 술이 되는 마법: 크바스의 부활
러시아 거리를 걸으면 커다란 통에서 노란 갈색 음료를 파는 노점상을 만날 수 있다. 크바스다. 호밀빵을 발효시켜 만드는 이 음료는 알코올 도수 0.5~1도로, 술이 아닌 청량음료로 분류된다. 놀라운 것은 크바스의 역사다. 900년대 문헌에 이미 보편적으로 마시는 음료로 기록되어 있다. 귀족과 농민 모두가 마셨다. 물보다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주요 음료였다. 러시아 속담에는 “크바스는 빵만큼이나 소중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고대에는 비타민B가 풍부한 약용으로 사용됐고, 겨울이 긴 러시아에서 괴혈병 예방에 도움이 되는 음료였다. 한때 콜라에 밀려 잊혀지는 듯했지만, 최근 건강 음료로 재조명 받으며 러시아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금주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밀주를 만들고 향수와 청소용액까지 마셨다. 하지만 크바스는 달랐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금주령에서 자유로웠고, 사람들은 일부러 크바스의 도수를 높여 마셨다. 10도 이상의 크바스도 드물지 않았다. 빵 하나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크바스다. 이것이야말로 러시아인들의 생존 본능이 만든 결과물이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크바스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의 식혜가 떠오른다. 곡물을 발효시켜 만드는 음료이다. 알코올은 거의 없고, 소화를 돕고,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전통 음료가 식혜다. 식혜는 최소 1740년경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엿기름으로 쌀밥을 삭혀 만드는 이 음료는 러시아의 크바스처럼 '물보다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음료였다. 수정과는 계피와 생강을 달인 물에 곶감을 띄운 것으로, 1765년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과 러시아, 거리는 멀지만 발효 문화의 본질은 같았다. 곡물을 발효시켜 영양을 높이고, 보존 기간을 늘리고, 건강을 지킨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러시아는 크바스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았다. 노점에서 거대한 통으로 팔고, 콜라와 경쟁한다. ‘공산주의의 콜라’라는 별명으로 자부심을 드러낸다. 한국은 어떤가? 식혜는 캔과 페트병에 갇혀 있다. 수정과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이유로 잊혀졌다가 겨우 재출시됐다. 직접 만들어 먹는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변화하는 러시아, 배워야 할 한국
2025년 9월, 러시아인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7.84L로 199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던 나라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다.
Z세대가 그 중심에 있다. “건강한 생활습관, 금주, 정신건강 관리”에 관심이 높아진 젊은이들은 보드카 대신 무알코올 맥주와 와인을 선택한다. 정부도 소비세 인상, 건강 경고 문구 의무화 등 강력한 정책으로 뒷받침한다. 러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의 40%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미국(37%)보다 높은 수치다. “보드카의 나라”라는 고정관념과는 다른 모습이다. 러시아를 보며 생각한다. 억지 술은 사라지고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는 건 좋은 변화다. 크바스가 콜라를 이기고 돌아온 것처럼, 식혜와 수정과도 다시 주목받는 시대가 우리에게 오면 좋겠다. 캔 음료가 아니라, 직접 만들어 나누는 문화로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