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의 삶
러시아의 겨울은 가혹하다. 영하 30도는 기본이고, 시베리아에선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 6개월이 넘는 긴 겨울 동안 땅은 얼어붙고, 신선한 채소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극한의 환경이 가장 풍성하고 독특한 식탁 문화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추위가 만든 천재성, 배고픔이 빚어낸 창의성이다. 러시아인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눈 덮인 대지에서 예술을 창조했고, 절망적인 겨울 속에서 축제를 열었으며, 보잘것없는 재료로 영혼을 울리는 맛을 빚어냈다. 이것이 러시아 음식의 진정한 매력이다.
시베리아 사냥꾼의 비밀 무기, 펠메니
타이가 숲을 헤매는 사냥꾼의 배낭에는 항상 한 가지가 들어있었다. 펠메니라는 러시아식 만두다. 영하 40도의 혹한에 자연 냉동된 이 만두는 몇 달이고 보관할 수 있었다. 눈을 녹여 물을 끓이고 펠메니를 넣으면, 그것으로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된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시베리아의 자연이 거대한 냉동고였던 것이다. 펠메니의 기원은 13세기 몽골 지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 이름은 우드무르트족의 언어에서 왔다. "펠"은 귀, "냔"은 빵. 직역하면 "귀 빵"이다. 만두를 빚은 모양이 귀를 닮았다는 의미다. 우리도 만두를 빚을 때 “귀 접듯이” 한다고 하지 않던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다.
펠메니의 철학은 단순함이다. 만두피는 밀가루, 물, 계란이 전부이다. 소는 다진 고기에 양파, 마늘, 후추만 들어간다. 한국 만두처럼 두부, 숙주, 당면, 부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은 “고기의 순수한 맛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먹을 때는 스메타나, 러시아식 사워크림을 듬뿍 찍어 먹는다. 느끼한 만두에 신 크림이라니 의아할 수 있지만, 먹어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딱 맞는 조합’이라고 말한다.
태양을 품은 팬케이크, 블린과 마슬레니차의 광란
펠메니가 생존의 음식이라면, 블린은 축제의 음식이다. 둥글고 황금색인 이 팬케이크는 태양을 닮았다. 6개월이 넘는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게 태양은 생명 그 자체였다. 그들은 블린에 겨울을 녹이고 봄을 불러들이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러시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처음 부친 블린은 항상 모양이 엉망이다.” 우리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와 비슷한 뜻이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이 속담을 말할 때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블린을 구우며 겪는 작은 실패가 인생의 시작을 말하는 속담이 되었다니, 음식이 삶과 이렇게 깊이 엮여 있는 나라다.
매년 2월 말, 러시아 전역에서 마슬레니차 축제가 열린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일주일 동안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마슬레니차에 실컷 놀지 않으면 평생 불행하게 살고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주일 내내 블린을 굽고,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심지어 얼음물에서 수영을 한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겨울을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태워버린다. 긴 겨울과의 결별을 상징한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가정에서는 수백 장의 블린이 구워진다. 꿀이나 잼을 발라 달콤하게, 캐비어나 훈제 연어를 올려 고급스럽게, 감자나 다진 고기를 속으로 넣어 든든하게, 먹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재미있는 풍습도 있다. 미혼 여성이 첫 번째로 만든 블린을 들고 거리로 나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주며 그의 이름을 묻는다고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그녀의 신랑감이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할머니의 항아리 속 비밀, 절임의 마법
“김치 없으면 밥 못 먹어요.” 한국인들의 이 말을 러시아인들은 오이 피클로 바꿔 말한다. “솔료니예 오구르치(절인 오이) 없는 식탁은 상상할 수 없어요.” 놀랍게도 지구 반대편 두 나라 사람들은 같은 고민을 했다. 긴 겨울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리고 똑같은 답을 찾았다. 절이면 된다.
가을이 오면 러시아 가정의 부엌은 전쟁터가 된다. 수십 개의 유리병, 끓는 물, 오이와 토마토, 그리고 할머니의 호령, 이름하여 ‘자까따’, 직역하면 ‘통조림 만들기’지만 사실은 1년 치 겨울나기 프로젝트다. 오이, 양배추, 토마토, 버섯, 베리... 여름과 가을에 나는 모든 것을 병에 담는다. 이것은 단순한 요리법이 아니었다. 생존 기술이었고, 어머니에서 딸로 대대로 전수되는 비법이었다.
러시아식 오이 절임은 우리가 아는 새콤달콤한 피클과는 다르다. 소금물에 발효시킨 것으로, 한국의 오이소박이에 더 가깝다. 비결은 재료에 있다. 통마늘, 딜(허버 종류), 호스래디시(서양 고추냉이) 잎, 건포도 잎까지 함께 넣는다. 이 조합이 오이를 아삭하게 만들고 독특한 향을 낸다. 흥미로운 건 먹는 방법이다.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마실 때 오이 피클을 곁들인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숙취로 고생하는 러시아인들은 냉장고에서 오이 피클 국물을 꺼낸다. 이 짭조름하고 시큼한 액체가 러시아 최고의 해장 음료다. 우리의 북어국, 콩나물국과 같은 존재다.
루비빛 위로를 건네는 한 그릇, 보르쉬
뉴욕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의 한 음식점, 이른 아침부터 러시아에서 온 미국인들이 줄을 선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30분을 기다려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한 그릇의 수프다. 스푼을 떠올리면 진한 루비색 국물이 하얗게 소용돌이치는 사워크림과 뒤섞이며 보랏빛 물결을 그린다. 입안에 넣는 순간, 대지의 단맛과 은은한 산미가 혀끝에서 춤을 춘다. 이것이 바로 보르쉬다. 우크라이나의 영혼이 담긴 동유럽의 붉은 수프, 보르쉬의 역사는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농부들이 구하기 쉬운 뿌리채소와 양배추로 끓여 먹던 서민의 음식이 어느새 러시아 황실의 식탁에 오르는 귀족 요리로 변모했다. 하지만 보르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라 소박함에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하는 동유럽 사람들에게 이 수프는 단순한 한 끼가 아니었다. 눈 덮인 벌판에서 캐낸 비트, 지하 저장고에 보관해둔 양배추와 감자, 그리고 가족을 위해 아껴둔 고기 한 점. 이 모든 것이 한 솥에 모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동안, 오두막 안은 김이 서려 따뜻해지고 가족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보르쉬를 보르쉬답게 만드는 것은 비트다. '땅속의 루비' 혹은 '붉은 피'라 불리는 이 뿌리채소를 자르면 진한 자주빛 즙이 흘러나온다. 비트의 붉은색은 베타시아닌이라는 천연 색소에서 나온다. 이 물질은 토마토의 8배에 달하는 항산화력으로 세포 손상을 막고, 염증을 가라앉히며, 암을 예방한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은 보르쉬를 ‘혈관 청소부’라 부른다. 하지만 비트의 진정한 매력은 영양소에만 있지 않다. 생으로 베어 물면 아삭하면서도 즙이 풍부하고, 은은한 단맛 뒤로 대지의 향이 감돈다. 이것을 양배추, 당근, 양파, 토마토와 함께 끓이고, 육수의 깊은 맛을 더하면, 복잡하면서도 조화로운 맛의 교향곡이 완성된다.
첫 숟가락을 떠먹으면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비트의 단맛, 양배추의 부드러움, 당근의 은은함, 그리고 사워크림의 새콤한 크리미함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 씹으면 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발견된다. 때로는 마늘의 톡 쏘는 향이, 때로는 딜(허버)의 상큼한 향이, 때로는 월계수 잎의 그윽한 향이 피어오른다.
러시아 식탁이 전하는 메시지
러시아 음식을 보면서 나는 가장 혹독한 환경이 가장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영하 40도의 추위가 자연 냉동고가 되어 펠메니를 탄생시켰고, 6개월의 긴 겨울이 태양을 닮은 블린을 축제의 중심에 세웠으며, 채소를 구할 수 없는 계절이 절임의 기술을 발전시켰고, 척박한 대지에서 자란 비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프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러시아 음식의 진정한 매력이다.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존을 위한 지혜, 가족을 향한 사랑,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한 그릇의 펠메니에는 시베리아 사냥꾼의 용기가, 한 장의 블린에는 봄을 염원하는 기도가, 한 병의 피클에는 할머니의 손길이, 한 그릇의 보르쉬에는 천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지금 이 순간, 러시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펠메니를 삶고, 블린을 부치고, 오이를 절이고, 보르쉬를 끓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는 같은 음식을 통해 이미 연결되어 있다. 김치와 오이 피클, 만두와 펠메니, 부침개와 블린, 된장찌개와 보르쉬가 바로 그것이다. 겉보기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이 자연과 맞서 싸우며 터득한 지혜다. 긴 겨울을 건너는 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태어난, 어느새 우리 삶의 일부가 된 맛이다.
이번 겨울, 러시아 음식을 한 번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 스메타나를 찍어 먹는 펠메니의 단순한 맛, 꿀을 바른 블린의 달콤함, 아삭한 오이 피클의 새콤함, 루비 빛 보르쉬의 따뜻한 위로, 그 안에서 당신은 혹한을 견딘 사람들의 지혜와, 겨울 속에서도 축제를 즐기는 낙천성과, 가족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사랑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