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문학의 나라, 러시아
1965년 겨울, 한국의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영화가 있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였다. 오마 샤리프가 연기한 의사 지바고와 줄리 크리스티가 연기한 라라의 애절한 사랑, 그리고 모리스 자르가 작곡한 〈라라의 테마〉곡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얀 눈 덮인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극적 로맨스는 당시 한국 관객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낙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그의 삶 자체가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보리스 파스테르낙(1890-1960)은 본래 시인이었다. 모스크바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음악과 철학을 공부했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칸트 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시인의 길을 선택했다. 1922년 출간한 시집 『누이, 나의 삶』으로 러시아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스탈린 치하에서 그의 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되었다. 대숙청의 광풍 속에서 파스테르낙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를 번역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런 그가 1945년, 55세의 나이에 생애 유일한 장편소설 집필을 시작한다. 바로 『닥터 지바고』였다. 1905년 혁명부터 1929년까지 격동의 러시아 현대사를 배경으로,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소설의 무대가 된 곳은 파스테르낙이 실제로 살았던 페레델키노였다. 페레델키노는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작가촌이다. 이곳이 작가들의 성지가 된 데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931년, 해외에서 돌아온 작가 막심 고리키에게 스탈린이 물었다. “외국 작가들의 생활수준은 어떻습니까?” 고리키가 답했다. “그들은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연 속 큰 집에서 삽니다.” 스탈린이 다시 물었다. “우리 소련 작가들에게도 다차(러시아식 별장)가 있습니까?” 답은 “아니오”였다. 스탈린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소련 최고의 작가 40~50명 명단을 작성하시오.” 이렇게 해서 페레델키노에 작가촌이 조성되었다.
자작나무 숲과 15세기 변모성당이 있는 이 한적한 마을에 50여 채의 목조 다차가 들어섰다. 변모성당은 예수가 세 제자들 앞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눈처럼 하얗게 변한 기적을 기념하는 러시아 정교회당이다. 작가들은 이 교회 아래서 영감을 받으며 글을 썼다. 파스테르낙은 1939년부터 19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소박한 2층 목조 건물인 그의 다차는 지금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현관에는 그가 신었던 장화가 그대로 놓여 있고, 2층 서재에는 그가 작업을 하던 책상이 남아 있다. 그는 정원 가꾸기를 즐겼고, 자작나무 숲을 거닐며 시상을 떠올렸다. 『닥터 지바고』의 수많은 자연 묘사는 바로 이 페레델키노의 풍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1946년 가을, 56세의 파스테르낙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문예지 『노비 미르』 편집부에서 일하던 34세의 올가 이빈스카야였다. 두 아이를 둔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파스테르낙의 시를 사랑하는 열렬한 독자였고, 처음 만났을 때 “신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파스테르낙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성에 매료되었다. 비록 파스테르낙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의 생애 마지막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올가는 그의 뮤즈(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여신)이자 비서가 되었고,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의 실제 모델이 되었다. 올가 자신도 후에 “나는 라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랑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1949년, 올가는 “반소비에트 담론”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실제로는 파스테르낙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올가는 당시 파스테르낙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수감 중 유산하고 말았다. 파스테르낙은 후에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나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비밀경찰은 그녀를 고문과 협박으로 심문하여 나를 재판에 회부 할 증거를 얻으려 했습니다. 내가 그 시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영웅적 인내 덕분입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올가가 석방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재개되었다. 파스테르낙은 1956년 완성된 『닥터 지바고』를 소련 내에서 출판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10월 혁명과 인민과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중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때 올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판사 펠트리넬리와의 협상을 전담하여 1957년 이탈리아에서 첫 출간을 성사시켰다. 책은 곧 18개 언어로 번역되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58년, 스웨덴 한림원은 파스테르낙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격렬히 반발했다. 작가동맹은 그를 제명했고, 언론은 “인민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파스테르낙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상을 받고 해외로 망명하거나, 상을 거부하고 조국에 남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상 거부를 선택했다. “노벨상 수상과 무관하게” 작가동맹에서 축출당했지만, 그는 페레델키노의 다차를 떠나지 않았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얽힌 다차를 빼앗길까봐”였다고 한다.
이 모든 고통과 굴욕은 그의 건강을 망쳤다. 1960년 5월 30일, 파스테르낙은 페레델키노의 다차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페레델키노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수백 명의 추도객이 모였는데, 그중에는 젊은 시인 예브게니 예프투셴코도 있었다. 파스테르낙이 죽고 나서도 올가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60년 가을, 그녀는 딸 이리나와 함께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외화 거래" 혐의였다. 파스테르낙이 이탈리아 출판사로부터 받은 인세를 올가에게 전달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범죄로 간주된 것이다. 올가는 8년 형을 선고받아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체포 당시 KGB는 그녀의 아파트를 수색하여 파스테르낙이 보낸 모든 편지와 원고를 압수했다. 올가는 1964년에야 석방되었고, 1988년 고르바초프 시대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었다. 1995년 9월, 올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닥터 지바고』는 1987년에야 소련에서 출판이 허용되었다. 파스테르낙이 죽은 지 27년 만이었다. 소설 마지막 장에 실린 <‘유리지바고의 시’ 25편>은 지금도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손꼽힌다. 파스테르낙은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외부에서 강요된 관념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전체주의와 획일주의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지키려 했던 지바고와 라라의 이야기는 결국 승리했다.
페레델키노의 파스테르낙 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필자도 두 차례 이곳을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숙연한 감동을 느꼈다. 그의 다차 2층 서재에는 낡은 피아노가 있다. 생전에 파스테르낙은 한 달에 한 번씩 지인들을 이곳에 초대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시를 낭송하며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방에는 데스마스크(사후에 얼굴을 떠낸 석고상)가 놓여 있다. 러시아에서는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같은 위대한 문학가들의 데스마스크를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파스테르낙 역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현관의 장화는 그가 자작나무 숲을 거닐던 시절을 기억하게 한다. 묘지에는 그와 올가가 나란히 묻혀 있지는 않다. 올가는 모스크바의 다른 묘지에 잠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닥터 지바고』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오늘날 K-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듯, 파스테르낙의 『닥터 지바고』는 냉전 시대 동서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예술은 정치적 경계를 넘고,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다. 눈 덮인 페레델키노의 다차에서 탄생한 이 불멸의 이야기는 그것을 증명한다. 파스테르낙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찍은 사진 속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고 한다. 비록 상을 거부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