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이너스통장
얼마 전 수십 년 동안 엄마의 카운슬러였던 무당이 신령을 올려 보내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무당의 오랜 단골이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묶어 주었던 무당이 떠나자 졸지에 조금 우울해졌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초하루마다 무당집에 모였던 그들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공유했고 위로를 받아 다시 삶의 에너지를 채웠다. 이 상황을 통해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무당이 신령을 올려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듣기로는 많은 무당들이 신내림 받기를 꺼려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신령을 보낼 수 있으면 굳이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내 물음에 엄마는 신령을 받은 후 충분히 불려 먹인 후에 무당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신령과 합의를 본다고 했다. 이때 ‘불려 먹인다’는 것은 신령이 만족할 만큼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군… 하고 돌아서다가 불현듯 기억나는 게 있었다. “그런데 엄마, 얼마 전에 쌀 20킬로 8 포대 바치지 않았어? 그 쌀들은 어떡해?”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고, 무당의 거취에 대해서만 안타까워했다. 손이 발이 되게 빌어서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키워 놨는데, 멀쩡한 것이 하나 없다고. 사람들하고 시간 맞춰서 요양원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했다. 이제 무당집에서의 초하루 모임은 무당 옷을 벗은 그저 노인일 뿐인 한 사람의 요양원에서 이어지겠구나.
엄마가 근 삼십 년 동안 함께 했던 무당은 연화보살이라는 별호를 가졌다. 나도 꽤 자주 엄마를 따라가 만나곤 했다. 처음 봤을 때는 40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나의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초를 켜주고, 부적을 써주었으며(아쉽게도 재수를 하긴 했지만), 첫 차를 샀을 때 사고가 나지 말라고 예방을 해주었고, 해마다 신년 운수를 봐주었으며, 각종 시험의 합격 불합격을 점쳐주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오방기를 하나 뽑으라고 하면, 두근두근 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주로 하얀색 기를 뽑았는데, 그럴 때마다 연화보살은 조상이라며, 우리 집은 외할머니가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잘 굴러간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종종 초하루 아침, 연화보살에게 가는 엄마 편에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잘 굴러갈 것인지, 만나고 있는 남자와의 궁합은 어떠한지. 이미 결정된 운명이라면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을지라도 잘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고, 잘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나쁜 소식에 앞서 마음을 다독이는 효과는 있었다. 그래서 내심 아쉬웠다. 나에게 있어 연화보살은 구급약통 같았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옆에서 지켜보았던 엄마 또한 그런 의미로 연화보살과의 인연을 이어간 것 같았다. 누군가 나만큼 우리 가족의 복을 빌어준다는 보약 같은 믿음과 급할 때는 응급 처방을 해 줄 수 있는 진통제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배부른 안도.
엄마는 이제 보살집(무당집을 엄마는 그렇게 부른다)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가까운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겠다고. 하지만 불공은 엄마가 말했듯이 적금 같은 것이다. 차곡차곡 덕을 쌓아서 언젠가 돌려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믜에서 엄마는 무당집이 마이너스 통장 같은 거라고 했다. 엄마는 이제 곧 새로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야 할지도 모른다. 남동생이 얼마 전 하던 일을 접고 대출을 왕창 땡겨 ㅇㅂㅈ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식당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직 나만 알고 있다. 입이 간질거려서 미칠 것 같지만 일단은 참고 있는 중이다. 동생이 한 달 후에 엄마에게 직접 말할 거라고 했으니까 의리상 지켜주고 있는데… 하지만 모른 척했던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그냥 확 말해 버려? 그럼 엄마는 관세음보살… 하면서 용하다는 무당집을 찾을 것이다. 가게 자리는 괜찮은 곳인지, 사업을 해도 괜찮은 수 인지… 엄마가 무당집을 끊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자식이 웬수이기 때문이다.
아, 그나저나 연화보살 이모! 엄마가 요양원 갈 때 같이 갈게요. 이모가 좋아하는 박카스 두 박스 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