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km 걷기
주말을 앞두고 아내와 우주는 충주로 내려갔다.
친정에 잠시 들를 겸, 봄볕 아래 쉬어가려는
일정이었다. 나는 함께 가지 못했다. 일이 있었고,
약속도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따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토요일은 흐렸다.
기온도 기분도 어정쩡한 날씨에
나도 어정쩡한 하루를 보냈다.
미뤄둔 드라마 몇 편을 틀었다가
자꾸만 다른 장면을 떠올리며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차가운 커피는 식은 줄도 몰랐고,
침묵이 낀 집안은 웬일인지 낯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땐 벌써 열 시.
평소보다 느린 시작이었지만
느리다고 해서 늦은 건 아니라고,
그렇게 나 자신을 토닥이며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걷는 날이다.
아주 멀리, 혼자서 한참을 걸어볼 참이다.
하남을 벗어나
한강을 따라 서울 방향으로 천천히 발을 옮긴다.
햇살은 제법 눈부셨고,
한강변엔 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러닝을 하는 이들, 자전거를 타는 가족,
푸드트럭 앞에 줄 선 아이들,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연인들까지.
반포에서 잠원, 잠수교를 지나 여의도까지
강가의 일요일은 생각보다 더 생기 있었다.
나는 헤드폰을 끼고
세상의 소음을 조금 줄인 채 걸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 밖을 걷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구경하고, 풍경을 눈으로 스치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가양대교까지 갔다가
되돌아 여의나루역까지 걷는 코스.
대략 43킬로미터, 마라톤 한 바퀴보다 약간
더 긴 거리다. 5월 가정의 달. 우주를 돌보는 일이
많았고. 나는 회의와 미팅을 핑계 삼아 운동을
자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달 목표 거리를
채우지 못할까 조금 조바심이 났었는데
오늘 하루로 평균을 맞췄다.
그걸로도 충분히 다행이라 여긴다.
일산까지 더 걸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출발이 늦은 탓에
돌아오는 교통편만 두 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결국 여의나루역에서 5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움직이는 지하철 속에서
나는 다시 가족을 떠올렸다.
집에 도착한 아내의 통화 너머로
“아빠 어디예요?”
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불쑥 달려간다.
이제는 걷는 이유가 달라진다.
집이 기다리고 있다.
미사역에 도착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조금은 간단히, 조금은 마음 담긴 장을 본다.
집에 도착해
서프라이즈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요일에 정복삼촌이랑 타미랑 레고랜드 가기로
했어.”우주의 눈이 번쩍 뜨이고
이야기 속에서 하이텐션이 튀어 오른다.
그 순간, 하루의 모든 피로가 녹아내린다.
마트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따니
오늘 하루가 고스란히 입 안에 퍼진다.
계획했던 50킬로에는 못 미쳤지만
45킬로면 오늘로썬 충분하다.
발바닥은 묵직했지만
마음은 가볍다.
혼자 걸은 하루였지만,
끝은 여전히 우주였다.
나는 오늘도 그 아이 곁으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