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라는 정차역에서 서로 마주친다
누군가가 말했다. 글을 쓰는 일은 인간 최후의 직업이라고. 사형수도 옥중에서 글을 써 책을 낸다고. 어느 일본 작가가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흥미롭게도 국가, 시대, 지위를 막론하고 해당되는 듯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안중근도, 현 시대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전 대통령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감 생활을 했다. 그들 모두 글을 썼다.
이들은 고독과의 사투를 벌이던 것일까. 아니다. 그러니까, 고독은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극복이라는 것은 비정상적 상태를 전제한다. 인간에게 고독이란 그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저기 휴대폰이 놓여 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저기 휴대폰 좀 가져다줘” 당신은 휴대폰을 집어다가 내게 건네준다. 그런데, 이 휴대폰은 당신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같을까?
당연히 같지 않겠느냐고? 맞다. 그러나 내가 나의 감정, 사고, 시선, 각도에서 본 휴대폰과 당신이 본 휴대폰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이처럼 하나의 물체마저 바라보는 관점이 제각기 다르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렇다. 오히려 사회, 문화, 시간, 집단 같은 무수한 필터가 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내가 보는 세상과 당신이 보는 세상은 결코 같지 않다. 지구상에 80억 명이 있다면 80억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모두 각자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모두 자기만의 독립된 서사가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타인의 이해와는 상충된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헤아릴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이제 다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다루는 것이다. 그조차 원형은 아니고 펜과 종이라는 매개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 글 속에는 나의 고독이 조금은 묻어 나온다. 옷을 입으면 채취가 배듯.
글쓰기 뒤에는 글을 읽는 행위가 수반된다. 누구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해도, 내 글의 가장 첫 번째 독자는 나 자신이다. 계속해서 나의 고독과 마주하는 작업이다. 그러면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건 어떨까?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쓴이의 세계에 접속함과 동시에 그의 고독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함께 고독하니까. 극복까지는 아니어도, 그래서 고독의 연대에 대해 말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세계가 고독을 품고 있으니까. 고독 속의 고통을 소통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