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나에게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by 나원

삶은 형벌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부여하여 그와 나를 동시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에게 출구를 찾게 해 주고 싶어서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작은 수첩을 샀다. 글씨를 휘날리며 무작정 감정을 쏟아냈다. 그게 치유의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수많은 힐링용 문구, 지금도 잘하고 있다 괜찮다는 그런 자질구레한 위로는 내게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내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가고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런 말이 꼭 필요한 위안일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도리어 괜찮아져야만 한다고 떠미는 것 같았다.





삶의 고통 속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음표를 그렸고, 빈센트 반 고흐는 붓을 지휘했으며, 알베르 카뮈는 글을 조각하여 그들만의 무지개를 만들었다. 내가 그들처럼 한 세기의 한 획을 긋는 예술가는 아니겠으나 그들이 그랬듯, "아픈 사람들이 글쓰기를 포함하여 예술을 한다"는 말이 더 위로가 되었다. 나만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게 아니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일까.



이별이 괴로웠기에 마음을 내어주지 않으려 하기도 했고, 상처가 두려워 회피했던 나날도 있었다. 그래야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나에게 글쓰기는 그 어떤 진통제보다 가장 덜 아프게 나를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글쓰기를 통해서 내면의 상처를 새로이 재구성해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 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마 나는 쓰디쓴 세상에서 계속해서 다치고 또 아프고 그리고 글을 쓰면서 회복하고자 할 테다. 그렇게 나에 대한 화해의 여정 속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수첩을 편다. 펜을 쥔다. 글씨를 써 내려간다. 내리는 비를 모두 막을 수는 없으나 우산을 쓰듯,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행운일지 모르겠다. 그 종착점이 끝내 닿지 않는 무지개일 수도 있겠지만...





쏟아지는 비도 언젠가는 그치듯, 나도 나를 사랑하는 햇살을 맞이하며 미소지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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