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으로 감정에 대해 설득해 보겠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 실수했을 때의 수치심, 남이 잘못됐을 때 은근한 기쁨을 느끼는 샤덴프로이데...
감정은 표출하는 순간 민폐이며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명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년간 지속된 인연과의 이별을 겪어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을 보낸다. 뜻밖의 성과로 인한 뿌듯함과 즐거움마저 겸손이라는 포장지로 감싼다. 프로다워야 한다는 명목 하에 지극히 사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이성이라는 가면 아래에 숨겨둔다. 나의 감정은 남들 시선 없는 저기 화장실 칸 안에서나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
내가 슬퍼도 거대 자본주의의 논리에 기반한 회사와 세상은 돌아간다. 익히 알다시피 회사가 커다란 기계라면 개인은 하나의 부품이다. 우리 개개인이라는 “부품”은 감정 때문에 삐그덕대 오작동을 하면 안 된다는 냉혹한 현실 속에 처해 있다.
사회는 가족과의 영원한 작별 정도는 되어야 며칠간은 일상에서 벗어나도 되며 그 기간 동안 슬픔을 표출해도 된다는 허가증을 쥐어준다. 이 또한 부품이 빠르게 정상작동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수단일 테지만.
이런 사회적 배경에 더하여 이성만의 그 특질 때문에 감정보다 우월한 것으로 오인된다. 다른 동물들도 감정을 느끼지만 이성은 인간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오직 이성만 존재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챗지피티, AI와 다를 바 없겠다. 인간에겐 감정이 있어서 그에 상응하는 ‘이성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감정이 있기에 창작을 할 수 있으며 감상을 통해 “아름답다”고 느낀다. 작품 또한 형식이라는 이성적 틀에 의하여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이처럼 이성과 감정 둘은 떼어놓을 수 없으며 조화를 이룰 때 서로를 더욱 빛낸다. 낮과 밤이 있기에 일몰의 아름다운 노을이 지듯.
창작처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이성이 함께하여 감정이 숨을 쉴 수 있게끔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은 어떨까. 참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표출되지 않고 억압되기만 한 감정은 임계치에 도달하면 어떻게든 누수된다. 건강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적용해야겠다.
감정 90초 법칙에 따라 타이머를 90초로 설정해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해 보기. 감정에 대해 가까운 이와 대화해 보기. 감정 일기와 같이 나의 감정에 대하여 글로 써 보거나 감정 이름짓기... 그마저 어려우면 마구 낙서를 해 보는 것도 좋다. 이들 중 하나를 택일해도, 혼용해도, 변형해도 좋다.
타인은 몰라도, 내가 나에게만큼은 나의 감정을 허락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