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도여도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ft. 서울교통공사
글에 앞서, 필자 또한 대중교통에서 임산부나 노약자, 교통약자 등에 대한 자리 양보를 포함한 배려는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지하철 안내 방송은 이들에 대한 배려를 위한 좋은 취지로 시행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이 글 또한 애먼 방송에 대한 트집이 아닌, 약자에 대한 배려를 또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함을 먼저 밝힌다.
“주변을 둘러보시고, 임산부나 교통약자가 계시면 자리를 양보하는 여유를 가져 보심이 어떨까요? 모두가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는 우리 모두를 기분 좋게 합니다.”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종종 들리는 안내 방송이다. 대중 교통을 함께 이용하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권유하는 무난한 듯한 안내 방송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이 방송을 들었을 때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후에도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지 이 방송이 수년째 지하철에서 송출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안내 방송 담화를 살펴보면, 권유에서 공감 그리고 감정적 보상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힘들지만 시민들이 힘듦에 공감을 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쓰였을 것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평범한 시민들이 대다수다. 그런데 팍팍한 현대인의 도심 생활이 힘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에게 또 한 번 “힘들지만” 이라며 굳이 현실을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을지가 가장 먼저 든 의문이었다.
(자리를 양보하는) 여유를 가져 보심이 어떨까요? 이는 배려를 권유하려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건이 충족되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모두가 힘든” 현실에서는 상당히 어렵다. 특히 혼잡한 출근길, 심신이 지친 퇴근길 만원 지하철의 상황과는 더더욱 맞지 않다. 이런 문제를 사회적•구조적인 측면에서 파악하기보다 여유 없는 개인을 바라보며 이들의 행동/마음을 바꿀 것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개개인의 사정은 각자 다른 만큼, 정말 삶의 벼랑 끝까지 몰린 누군가에게는 조롱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던 지점이다. 이는 고통은 비교 가능하며 누군가의 고통은 가볍고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은 그보다 더 무거울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 많아”, “그래도 아프리카 아이들보다는 덜 불행하지 않냐” 와 같은 논리 구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타인의 고통을 호출해서 나/우리의 삶이 낫다 말하는 점, 고통은 비교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으며 그 고통에 대해 평가할 자격은 없다. "모두가 힘든" 세상에서 고통마저 서열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교통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 힘들어서, 더 고통스러워서’ 보다는 ‘이동 수단에서 시간이 더 소요되는 등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어서’라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듯하다.
추가로 아쉬운 점을 살펴보면 배려를 꼭 "기분 좋음"이라는 감정적 보상으로 연결해야 했을지가 의문이 남는다.
"노약자와 임산부, 교통약자에게 자리를 먼저 양보하는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지하철 이용을 위해 서울교통공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도였다면 오히려 핵심이 더욱 분명하게 남는다. 언어란 취지가 제아무리 옳아도 발화자(기획자)의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지만은 않는다. 그러니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추가하는 것보다 요점만 간결히 전달하는 편이 불필요한 오해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으며 청취자의 듣는 피로감 또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좋은 취지의 안내 방송인데 이런 것을 일일이 문제 삼는 나에게 과하게 예민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공 기관에서 송출되는 안내 방송인만큼 예민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안전문제를 피곤하더라도 꼼꼼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처럼 이런 공공언어도 다각도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공공언어 또한 안전과 완전히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좋은 취지로 설치한 마포대교의 격려 문구가 오히려 더욱 많은 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었듯. 의도가 좋았다는 말이 곧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노약자, 임산부 등 교통약자의 절대적인 수가 적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배려가 불필요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공 기관의 안내 방송에서도 크든 작든 고통받을 수 있는 소수의 누군가를 위한 섬세한 배려 또한 필요하다.
공공 기관에서의 방송은 사설 기관보다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에 보다 신중을 기하여 안내 방송 문구를 기획하였으면,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공공 기관에서의 안내 방송을 포함한 여러 매체에 대해서 좀 더 비판적으로 듣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토론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