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 공원에서
길어진 백수 기간에 통장은 나날이 가벼워지고 그와 반대로 쌓여가는 장바구니를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뭐라도 해서 사고 싶은 물건 좀 편하게 사보자. 다짐했다. 그렇게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이던 중에 발견한 ‘한국 마사회 경마지원직’ 한국마사회는 들어봤는데 경마지원직은 뭐지? 어차피 내가 들어갈 수도 없는 회사이고, 고 스펙자가 득실득실하겠지. 지레짐작으로 시도도 하지 않고 넘겼다. 그렇게 몇 날 며칠 생각 없이 구인 사이트만 들락날락하다가 여전히 떠있는 경마지원직을 봤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뭐하는 곳이지? 들어가서 내용을 쭉 살펴봤다. 말 그대로 경마 경기가 진행될 때 고객 응대하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 2회 근무.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하면 딱 좋은데, 지원해 봐? 가벼운 마음으로 알바다 생각하고 지원서를 찾아봤다. 알바라고 생각하기에는 자기소개서까지 써야 하는 귀찮음이 있었다. 게다가 지원 날짜가 오늘까지인데 내가 제출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굳은 머리를 회전시켜 자기소개서를 급하게 썼다. 이렇게 급하게 쓰는 모습이 꼭 과외 숙제 전날에 몰아하는 기분인걸... 데자뷔를 느꼈다.
오랜 백수 생활에 자소서 쓰는 방법은 애 진작에 다 까먹어서 한 글자도 쓰기가 어려웠다. 나 회사 어떻게 다녔지. 자기소개서 어떻게 썼지... 자기소개라는 항목부터가 난감했다. 뭘 소개하라는지.. 대충 학교 다닐 때 했던 아르바이트들을 나열했다. 투썸플레이스 6개월, 설렁탕집 2개월, 사무보조 및 응대 1년. 그다음 지원동기. 지원동기는 왜 묻는지 쓸 때마다 궁금하다. 당연히 돈 벌려고 지원하는 건데 뭘 바라고 지원동기를 쓰라는지. 이것도 일단 썼다. 새로운 경험.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쓰고 나니 너무 짧았지만 쓸 말이 없어서 넘어갔다. 다음으로 쓴 경력사항 자기소개 항목에서 썼던 아르바이트 경력들을 다시 한번 업무 위주로 적었다. 내가 썼지만 죽어도 안 뽑을 이력서가 완성됐다. 그래, 뭐. 그냥 해보는 거지. 제출하고 별생각 없었고, 큰 기대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 면접 날짜와 복장에 대한 안내가 있는 합격 문자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문자에 놀랐지만 면접을 어떻게 준비할까 고민이 컸다. 아니, 사실 고민도 안 했다. 알바라고 생각해서 신경도 안 썼다. 인터넷에 경마지원직을 검색하고 제일 처음 본 글은 ‘대학생 방학 꿀 알바 소개합니다.’였다. 와 이거 꿀 알바였구나. 뒤늦게 경마지원직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며 면접에 대한 팁을 얻기 위해 계속 검색했다. 아무리 검색해도 지원직 면접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가장 최근 21년도 글도 있었지만 한 두 개뿐이었고, 그 이전의 글이 대부분인데 그것마저 몇 개 없었다. 사람마다 말하는 게 다 달랐지만 많이 겹치는 내용들을 살펴봤을 때 ‘면접 시간은 짧고 질문도 개인보다 단체 공통질문이 주이다.’였다. 개인 질문이 면접 결과에 영향을 주진 않는 다고 했다. 답변도 간단히 준비했다고 했고 복장도 캐주얼하게 입고 갔다고 쓰여있어서 쉽게 생각했다. 쉽게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그래도 나름 공공기관의 소문난 꿀 알바 자리였는데..
서울 랜드도 안 가본 내가 경마공원으로 면접 보러 과천에 간다니 참 신기하다. 가는 길을 찾아보니 1시간 30분... 오.. 진짜 멀어... 집 오면 저녁 시간이겠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도착한 경마공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입구도 크고 넓고 들어가는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대박. 우와 진짜 신기하다. 마스크 속에서 헤벌레 하며 입을 벌리고는 길을 찾아다녔다. 초행길이어서 길을 헤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발전된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주머니에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사람들도 몹시 친절해서 내가 길을 모른다는 눈빛으로 눈을 마주치니 가까워지기도 전에 ‘면접 보러 오셨어요? 그럼 저쪽으로 가세요.’ 해주셨다.
도착한 곳에는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강당으로 들어가기 전 사전에 이력서에 썼던 내용을 다시 기입하며 출석 확인하고 주의사항 종이와 번호표를 받아서 들어갔다. 여기 어딘가에서 보는 건가. 아무 곳이나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서 앉고 나눠준 종이를 살펴봤다. 블라인드 면접이라 이름, 출신지역, 학교 등을 말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쓰여있었다. 처음 블라인드 면접이라고 들었을 때 정말 블라인드를 면접관 앞에 치고 얼굴도 안 보고 보는 면접인 줄 알았다. 그건 아니었다. 간단한 주의사항들을 다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면접 보는 장소를 찾아보기도 했다. 구석진 곳에 문이 있었고 그 앞에 사람이 종이를 들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 저기가 면접장이구나. 했는데 그냥 서있는 사람이었다.
10분 일찍 도착했지만 순서를 기다린 지 30분이 지나갈 때 내 이름과 5명의 이름이 같이 불렸다. 드디어 내 차례군. 하고 ‘새롭고,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만 생각하다 면접장에 들어갔다. 번호표 숫자 순서대로 줄을 서다 보니 내가 제일 뒷번호여서 순서도 제일 마지막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소개 및 지원동기를 물어봤다. 첫 번호부터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경마지원직에 지원하게 된 A-38번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경마에 관심이 많았고....”
“안녕하세요. 저는 경마지원직에 지원한 A-77번입니다. 저는 전공으로 동물 관련된 학과를 나와서 돼지와 강아지 등과 함께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말과 함께하는 경마지원직에...”
뭐야. 뭔... 이게 무슨 일이야... 기업 면접이야 뭐야. 하필 내 순서 마지막이고 와 왜 점점 길어져... 하... 하하... 망했네. 생각해보자. 뭐라고 더 말하지? 새로운 경험과 색다른 경험 또 뭐가 있지, 와 새로운 색다른... 새롭고, 색다르고 또... 즐겁게 일하는 거? 나는 어릴 때 뭐했지 내 전공 뭘 살리지 기계과를 뭘 살려 살리기는... 내 순서까지 남은 사람들을 세면서 속으로 더 할 말이 없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그 와중에 A-78 번님은 강점 3가지 SSS가 있다고 ‘첫 번째 S는....’하고 있었다. 눈앞이 살짝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웃으며 아닌 척했다. 피하고 싶었던 내 순서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A-83번입니다. 저는 새로운 경험과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지원하게 됐습니다. 즐겁게 일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하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서 지원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소개가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 3분 4 분할 때 30초 만에 끝이 났다. 체감 30초지 20초 정도 된 거 같았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지원하셨는데 업무 중에 가장 자신 있는 업무 2가지만 말씀해주세요.”
이번에야말로 망함을 느꼈다. 오... 내가 아는 업무 자체가 고객응대랑 발권 밖에 없는데... 발권은 돈 만지는 거라서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 내가 아는 게 2가지뿐이다. ‘제가 사실 업무를 2가지 밖에 모릅니다. 고객 응대, 발권, 잘할지는 모릅니다.’ 할 수도 없고 선택지가 없다. 내 차례가 됐다.
“저는, 어, 전화로 하는 업무로 고객 상담 비슷한 걸 한 경험도 있어서 고객 응대 부분과 어, 또, 다른 하나는, 어, 발권하는 업무를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말해버렸어... 망했다. 오히려 망했다고 생각이 드니 더 웃음이 났다. 근무지랑 근무요일을 물어보는 걸로 체감 한 시간 면접이 끝났다. 저 따라오세요. 하는 면접관님의 뒷모습을 보고 웃음이 계속 났다. 아까부터 느껴졌던 망기운에 실실 웃음만 났다. 저는 사실 고객응대도 못하고 발권도 못합니다. 저는 절대 뽑지 마시고 저랑 같이 면접 보신 분들 꼭 뽑으십시오. 그분들 아니면 누가 일합니까. 속으로 한탄을 한 바가지 하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