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빛

by 김혜진

비 오는 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카페의 커다란 창가에 앉아 창밖의 풍경에 빠져 있었다.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는 비 오는 날의 잊지 못할 추억을 털어놓는다. 그녀들을 슬프게 했던 첫사랑의 남자가 우산을 쓰고 떠났고, 희고 예쁜 스커트를 입고 통학버스를 타려던 대학 새내기는 고인 빗물에 엎어져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비 오는 교정에서 한 시간 동안 용감하게 비를 맞으며 세상에 반항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멋쩍어했다.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배경으로 앉은 그녀들은 모두 영화 「클래식」에서 조인성과 비를 맞으며 뛰는 손예진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바뀌고 곧바로 대화는 하나의 주제로 대통합된다. 모두 여기저기 아프다. 팔 한쪽이 굳어서 수술을 받았고, 도수 치료를 받은 사람이 있으면 연이어 그 도수 치료의 효과와 유명 트레이너의 경력이 나오고, 바로 치료 견적이 그 자리에서 나온다. 당연히 치료를 잘하는 병원 이름과 그 병원의 빠른 접수 방법까지 숨겨두었던 비책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그 대화를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대화의 내용에 따라 자신의 팔을 돌리고 무릎을 움직인다. 좀 전의 그 꽃 같은 소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자주 웃으면서 말한다. 세상에 오는 것은 순서에 따라서 왔지만, 세상을 떠나는 것에는 순서가 없다고 한다.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아프지 않게 살다 가고 싶은 것은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픈 건 괜찮은데 주변 사람이 아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더 싫단다. 그래서 만보를 걷고, 등산을 하고, 헬스장 회원권을 끊는다. 그리고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고 가장 좋은 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그게 지금을 사는 삶의 이유라면 조금은 슬프다.

지난 4월 평촌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회가 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조용히 내리는 빗물은 한창이던 벚꽃 잎이 거리 위에 내려앉게 했다. 같이 간 지인은 세계적 피아니스트라는 백건우가 거리에 젖은 벚꽃잎처럼 한물간 모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그는 새 앨범을 내놓을 때마다 전국 투어를 한다. 올해도 작년에 이어 모차르트 곡으로 앨범을 내고 투어 중이다.


사실 나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의 이름에 덧입혀진 많은 스캔들이 클래식을 잘 알지 못하는 나를 편견으로 몰아넣은 탓도 있었다. 특히 작년 연주회에서 그가 보여준 무표정은 관객에 대한 냉소가 아닌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연주회는 달랐다. 그의 슈만에 반한 나였지만 그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에서 그의 섬세한 감정선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팔순의 노 피아니스트의 옆얼굴에서 어린 소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마지막 곡 모차르트의 환상곡 가단조를 듣고 있는데 눈물이 났다. 연주를 마친 그도 울컥한 듯 보였다. 그 순간 그는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빛나게 했을까? 아마도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나이 먹지 않고 살아 있었던 열정이 그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왔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나이랑 상관없이 빛을 잃어버리지 않은 그 무엇이 내면에 숨어있을 것이다. 겹겹이 세월로 싸인 것들 속에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건 우리의 소년과 소녀이다. 비록 팔다리가 예전처럼 부드럽지 않아도, 비 오는 날 여기저기 불편하고 마음이 우울해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빛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단지 ‘이 나이에...’라는 단서를 달고 보려 하지 않을 뿐.


이제부터 나는 철딱서니가 좀 없기로 했다. 굳이 철딱서니를 찾아 모시고 싶지 않다. 철딱서니 없는 ‘멋진 나’도 가능할 것이다. ‘멋진 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풍겨오는 이미지가 있다. 모두가 부러워할 외모 뒤에 오는 불편함도 있고, 그냥 좋은 사람 같은 느낌도 있고, 독특하게 궁금해지는 사람도 있다. 그게 바로 사람 속에 살아있는 나이 먹지 않는 내면의 빛인 것 같다. 진정한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그 살아있음은 우리가 삶에 대하여 가지는 열정이다. 그래서 머뭇거리지 않고 내 속의 따뜻한 그 빛을 꺼낸다면 내 옆의 공간은 온기와 함께 밝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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