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통과하는 나무

by 김혜진

엊그제부터 바람결 끝이 순해졌다. 여전히 한낮의 햇볕은 모든 걸 백색으로 탈색시킬 것 같은 위세이지만 그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와서 힘들어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와서 힘들어한다는 우리나라의 여름과 겨울이다. 어느 오래된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은 가고 추억과 사람만 남는다. 오늘은 2025년 8월 11일이다. 작년 8월 10일에도 밤에는 조금 시원해져서 여름이 갈 준비를 한다고 일기에 썼다. 요즘은 계절의 구분이 없다지만 지구는 분명한 사이클을 돌고 있다.


“과거에 매이기 싫어서 이젠 일기를 안 쓰기로 했어.”

오래 알고 지내는 분이 하신 말씀이다. 부침이 많았던 삶 탓에 지난 일기를 보면 자꾸만 그 기억이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또 힘들다고 한다. 과거의 기록이 그를 옥죄는 사슬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정말 과거가 현재의 사슬 역할밖에 하지 않을까?


안방 수납장 안쪽에 내가 숨겨놓은 일기장이 있다. 14권의 일기장과 그리고 각종 기록물 4권 정도이다. 어릴 때부터 일기 쓰는 걸 좋아했다. 담임선생님들 중에는 잘된 일기를 꼭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분이 계셨다. 내 일기는 자주 읽혔다. 절대 손들고 무얼 하겠다는 성격이 아니니, 타인의 선택으로 인해 튈 수 있는 소심한 기쁨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아이들이 삐뚤빼뚤 써 간 초등학교 일기장을 참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그 귀중한 것들은 이사 한두 번에 모두 처분되어 지금은 없다.


‘일기를 써 보아야지.’ 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 같지는 않다. 순간을 붙들고 싶었다. 손끝에 나비처럼 앉았다가 떠나는 순간은 어쩌면 영겁의 시간과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이런 멋진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딸리는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살면서 어느 순간 나는 메모광이 되었다. 어느 때는 ‘데일리 리포트’를 지향하며 시간 단위로 사실과 감정을 간단히 적었던 기억도 있다.


나는 자기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정해 줄 수 있다. 습관과 루틴이 나를 만들어 간다고. 쉽게 말해서 나는 강해져 갔다. 특히 가족들과 중요한 기억을 말할 때는 나를 이길 수가 없다. 긴가민가할 때는 조용히 안방을 다녀오면 되니까. 어찌 보면 더 까탈스럽게 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는 셈이다.


지난 일기장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때의 내가 거기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어도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바쁠 때, 갑자기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곤 한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때다. 수납장 안쪽에 숨겨둔 일기장 아무거나 한 권 뽑아 든다. 감정 따라 다른 글씨체(?), 아무렇게나 스크랩해 놓은 영수증, 입장권 등도 눈에 띈다. 아프고 속상한 맘도 한가득 적혀 있다. 그 행간을 다시 거닐며 ‘그때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듣고 싶은 메시지를 전해 받고 싶어 한다. 내가 시간을 통과하는 방법이다.


일기장은 시간을 따라 브랜드가 달라져 있다. 처음 두어 권은 양지사 일간 다이어리,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버거워했던 프랭클린 다이어리도 1권 껴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사용하여 전집처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색색의 몰스킨 데일리 다이어리다. 요즘은 종이 색과 질감에 빠져 미도리사의 데일리를 몇 년째 사용 중이다. 나만 알고 있는 꽤 괜찮은 친구들 같다. 지금은 있던 것도 버리는 미니멀이 대세다. 어떤 분은 누가 볼까 봐서 일기를 못쓰겠다 하기도 학고, 워드 작업 후 파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기는 필기구와 종이의 사각사각한 만남의 공간이다. 클릭보다는 책갈피 넘어가는 소리가 추억으로 더 잘 안내해 준다.


그런데 일기를 쓰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 타인뿐 아니라 가족도 내가 하는 일에 말하지 않으면 관심이 없다. 그렇게 일기장 권 수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글쎄, 더 먼 훗날 나의 일기장을 볼 사람이 있을까? 내 못나고 부끄러운 감정을 읽으며 화를 낼까? 차라리 그래 주면 더 고마울 수도 있겠다. 언젠가는 쌓인 일기장을 내가 처리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는 나를 위한 일이다. 타인의 감정을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근에는 감사 일기. 5년 일기, 독서 일기도 노트를 달리하여 아주 짧게 아주 간단히 적는다. 특히 5년 일기는 나에게 색다른 감동을 준다. 굳이 다른 일기장을 펼치지 않아도 상단에 이삼 년 전 오늘 자의 날씨와 중요한 일, 감정이 한두 줄 적혀 있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 지워져 있던 일이 그 순간 빛을 발하며 살아난다. 분명 순간이 영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때이다. 시나브로 현실은 입체가 된다. 그래서 또 내일을 견딜 용기를 얻는다.


일 년 간의 손때를 고스란히 묻힌 채 숨어있는 일기장은 내 마음의 창고다. 못난 나도, 잘난 나도 ‘나’로 살아낸 기록이다. 먹다 흘린 과자부스러기도 박제되어 있고, 한 방울 튄 커피 자국, 때론 그 계절의 잎사귀나 꽃들이 눌려 있다. 그리고 가끔 빼먹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채워간 내가 뿌듯하다. 거울을 보며 내 머리를 곱게 쓰담쓰담해준다. 너는 그때도 지금도 부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지만, ‘결코 뽑히지 않고 그 바람을 통과하는 나무 같다’라고 나직이 말한다. 나를 기억하는 나에게 전하는 최고의 칭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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