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

황석영 <철도원 삼대> p259~p284, 8-3

by 김혜진

“김형선은 다시 이재유에게 함경도로 갈 것을 타진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한마다로 거절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운동이 활발하게 진전된 함경도가 아니라 이제 시작하고 있는 경성이며, 이 지역의 노동운동이 성숙한 이후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그는 말했다. 김형선은 자신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이재유가 못마땅했지만 그를 강제로 떠나게 할 수는 없었고, 결국은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기관지를 만드는 일만 합의한 셈이었다.”(p261)


*****중국을 통해 국제적 연결망을 가진 쪽에서는 이재유를 원했다. 이재유는 노동운동이 또 다른 권력으로 가는 것을 경계했다. 이 땅에서 그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었고 기꺼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거창한 국제적 선언문을 원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 농민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진정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방우창이 벌떡 일어나 사내의 면상을 들이받았고 장이 칸막이 밖으로 나가면서 그자를 한 번 더 발로 찼다. 장은 얼결에 정면 통로로 밖을 향하여 달려 나갔고 김형선도 그 뒤를 따랐다.(중략) 방우창은 막다른 골목의 담을 턱걸이하여 뛰어넘고 그 집 마당을 지나 어두운 철도 연변으로 나왔다. 아직은 서로 외치는 고함 소리가 요란한가운데 그는 철도를 넘어 익숙한 샛강의 둑 쪽으로 뛰었다. 이제 그는 합숙소로 돌아가서는 안되며 영등포에 머물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p263)


*****김형선의 갑작스러운 만남 제안은 밀정에 의해 탄로 난다. 김형선과 장은 경찰에 잡히고 방우창은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다. 다시 자기가 활동하고 일하던 영등포로는 돌아갈 수 없다. 방우창을 향한 숨 막히는 추격전은 그날의 밤을 박제시키며 또 다른 삶의 고달픈 여정을 제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조선인인 일본 경찰의 밀정들. 그들은 밤을 쫓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손을 피해 달음질을 쳐야만 하는 동족이 있었다. 역사는 항상 손 밑의 가시에 더 아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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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천까지 그는 칠십여 리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철은 날이 새자마자 노량진까지 걸어가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 이르렀다. 마음이 조급했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 시작된다. 활동가들에게는 이십사 시간의 불문율이 있었다. 즉 체포된 자는 고문을 받기 마련이며 그가 알고 있는 다른 동지들의 도피를 위하여 최소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치안 당국도 그런 점을 알고 있어서 검거하자마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하여 ‘쥐어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의 고문을 가했다.”(p267)


*****어둠 속에 찾아온 방우창을 보낸 이철은 마음이 조급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경성의 조직원들을 다 연락해 피할 수 있게 해야 했다. 불온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정의는 왜 그들이 마음대로 정한 불온의 딱지를 받고 도망해야 하는 것일까? 이철은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누구보다도 민첩해야 했다. ‘결국 조직이란 모든 약하고 외로운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저자는 말한다. 조직을 위한 거대한 테투리에서 헌신하지만 살아남는 일은 개인의 일이라는 뜻이다. 어두운 밤 속에서 명멸하는 누군가의 입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더 춥고 더 고달픔에도 기꺼이 그 길을 간 많은 우리의 선조들이 있다.




“한여옥은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일까. 신금이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었던’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금이 할머니는 아들 이지산과 손자 이진오에게까지 늘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시절에 가엾은 여자가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p283)


*****‘사랑받을 겨를이 없었던’ 여자. 격동의 시기 모두가 그랬겠지만 그 시기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낸 사람들에게는 사랑은 최우선은 될 수가 없다. 특히 돌봄의 테두리가 사라져 버린 엄혹한 시기의 여성들은 더욱 그렇다. 김형선 쪽의 래포였던 한여옥은 이철의 집으로 도피하면서 자연스레 부부가 된다. 사랑은 그렇게 시기를 가리지 않고 또 그렇게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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