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철도원 삼대> p236~p258, 8-2
“한여옥이라구 합니다.”
“신금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의 신체 윤곽이 햇빛 속에서 희부염 하게 녹아버리는 걸 보았다. 그녀의 뒤에 두쇠 이철이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고 그가 아기를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아기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을 쳐들고 조막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p235)
*****일철의 아내 신금은 시동생 이철의 짝이 될 한여옥을 보고 있었다. 한눈에 그녀가 우리 집 사람임을 알아본 것이다. 함께 살아가게 될 식구다. 신금의 눈에 들어온 인연은 앞으로 함께 할 시간들을 보여 주었다. 이철이 노동운동을 하며 만나게 된 한여옥과의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나 보다. 언제나 현실은 정해진 미래를 위해 움직이는 지도 모른다.
“전국 각 지방의 농촌 도시마다 이름 없는 사회 중의 그룹들이 형성되어 수많은 소각쟁의와 노동쟁의를 끊임없이 벌이며 투쟁하기 시작한 것도 삼일운동 이후의 시대적 특징이었다. 이재유는 이들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노동자 농민들, 즉 자신의 생존권을 걸고 투쟁에 나서는 민중 속으로 찾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p240)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뿌리가 이렇게까지 올라간 줄은 몰랐다. 숨죽여 살기만 했던 민초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라 잃은 아픔은 오히려 일반 백성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망국이 누구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겠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일제의 수탈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바로 보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다.
“아무튼 이이철이 그들과 우연히 접촉하게 된 때는 아직 초기였던 셈이다. 그들이 경성지역의 각급 학교에서 맹휴를 감행하고 공장들에서 최초의 연쇄적 파업을 일으켜 부분적으로 승리하거나 또는 검거되면서도 아직은 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있던 기간은 거의 일 년 반쯤이었다. 일제의 치안당국은 전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뭔가 불온한 기미를 알아채고 촉각을 곤두세워 내사를 벌이기 시작했다.”(p242)
*****불온은 전염병처럼 다가온다. 실체도 모호하다. 하지만 확실히 공기의 흐름을 바꾸며 사방에 번진다. 일제의 압제 아래에 퍼져나가는 조선의 불온은 노동자 농민의 숨죽인 숨결일 수도 있다. 모호하지만 분명히 살아 숨 쉬는 땅의 메아리다. 궁핍한 삶은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빼앗긴 땅은 그렇게 깨어나기 시작한다. 일제의 치안 당국은 그 숨결에 긴장한다.
“이 질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당재건운동에서 흔히 나타나고 있는 해외 중심주의와 국제노선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추종, 자주적인 운동 방침이 없이 국제선의 권위를 빌려 활동가들 앞에 군림하려는 태도, 대중적인 기반 없이 소수의 운동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을 결성하려는 방식 등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p256)
*****이이철이 관련되어 있는 국내 노동운동 조직의 이재유는 자신을 국제선의 지도하에 두려는 김형선에게 민족적 기반이 없는 국제선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노동운동의 주체는 노동자이며 그 노동자는 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국제선의 합류를 바라는 것을 이재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념이나 권력을 위한 운동조직이 아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