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발걸음

황석영 <철도원 삼대> p470~p512, 15-1

by 김혜진

“그들은 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때에 여관에서 나왔다. 일철은 아우에게 작은 륙색을 건네주었다. 안에는 군용 수통과 건빵 두 봉지 그리고 요강으로 사용할 유탄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아우가 의주에 나가 있던 사이에 일철이 시장에 나가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아마 우편실에는 두세 사람이 탑승할 것입니다. 책임자인 편장과 장부를 정리하는 원부와 기차가 정차할 때에 우편물을 내리고 올리는 인부가 있습니다. 지금은 명절 때도 아니고 환절기라서 아마도 화물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특급열차 폼으로 가서 우편열차에 올랐다. 일철의 안내로 우편실을 지나 쪽문을 열고 소하물 칸으로 들어섰다.”(p478~479)


*****아우 이철의 임무를 위해 형은 기꺼이 동생을 데리고 신의주로 왔다. 다시 김 선생을 데리고 경성으로 향하는 길은 위험했다. 하지만 일철은 기꺼이 그 일을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도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동생의 일이기도 했다. 비록 황국신민으로 모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자신이지만 그 마음속에는 ‘내 나라’에 대한 생각이 절실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동생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화물차에 숨어가야 할 동생과 김 선생을 위해 말없이 필요한 것을 준비해 건네준다. 형은 기관수로서 기관차로, 동생은 소하물 칸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무심한 뒷모습,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때로 눈물겹다.




“그의 합류로 경성콤 그룹이야말로 일제 치하 경성지역 노동운동 노선과 지역의 차이를 불문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인 결사체였다고 증언했다. 이 기간에 백여 명에 이르는 활동가가 가입하거나 준회원으로 등록했다. 경성 당재건파의 주도 아래 화요파의 박헌영을 위시하여 상해파 운동가들에 이르기까지 아직 변절하지 않고 활동하던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이 총망라되었다. 이것은 권 모의 국제선에 의하여 파벌주의로 척결되었던 경성 당재건파의 승리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p489)


*****이철이 활동하는 국내 조직인 당재건파를 중심으로 경성지역 노동운동이 기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김형선이 들어와 국제선 아래에서의 활동을 종용하였지만 이재유를 비롯한 국내조직은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위한 노동운동을 할 것을 주장하였었다. 결국 상해의 박헌영이 국내에 잠입해 힘을 보탬으로 그들의 활동이 실천적 승리였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선이든 국내파이든 누구를 위한 활동인가 하는 원론적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파벌 구축이 아니라 일제 아래 숨죽이고 있는 열악하고 비참한 노동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 조직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국내파의 준회원 증가로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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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아우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구 있는 건가?/ 야마시타가 이일철에게 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오히려 되물었다. /나두 참 답답하네, 혹시 자네는 뭔가 알구 있지 않나?/ 보호관찰 수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검거되면 즉각 재구속이다./ 일철은 말없이 차를 마시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지방에 있든지 외국으로 가버린 게 아닐까?/ 야마시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자네가 기차에 태워 대륙을 빼돌린 건 아니겠지?/ 글쎄, 그렇게라두 해서 집안의 말썽쟁이를 치워버렸으면 좋겠구먼./ 이일철은 대꾸하면서 등판이 서늘했지만 얼른 덧붙였다”(p491)


*****일철은 잠깐 뜨끔한다. 동생 이철의 임무를 도우기까지 했지만 그는 동생의 행방을 몰라야만 한다. 예리한 야마시타 최달영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은 듯 집안의 문제아 취급을 하며 모면한다. 사실 집안에서 세상 물정을 그나마 알만한 사람이 일철이다. 어쩌면 이철의 행동을 걱정하며 뜯어말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 이백만의 침묵 속에서 배웠듯 그의 속마음은 여느 독립운동가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야마시타는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미행 도중에 알아차렸다. 즉시 체포를 미루었다가 오히려 그들에게 시간을 벌어준 셈이 되지 않았는가. 야마시타는 이이철이 태연하게 신포정으로 곧장 걸어와 혼자서 저녁을 시켜 먹기 시작하자마자 그가 진작부터 미행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집 음식이 맛있어요. 형님 제가 주문해 드릴까요?/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오자 야마시타는 함바그를 시키고는 말했다./ 그래, 이게 피차에 마지막 식사니까……./”(p498)


*****죽을 자리인 줄 알면서도 대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걸어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 시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서슴없이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쫓고 쫓기는 자들, 그들은 어쩌면 이미 서로의 동선과 감정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이다. 그러기에 급할 것도 당황할 것도 없었다. 삶과 죽음의 능선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능선을 아무 두려움 없이 걸어 들어가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이철은 그렇게 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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