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고들 한다. 남들이 하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내 손에 쥐여주면 자신 있게 해낼 일은 많지 않다. 특히 밖에서 보는 것이랑 내가 직접 그 세계에 뛰어들어서 해보는 것은 전해져 오는 무게감이 천지 차이이다. 그럼에도 가끔 우리는 오해한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꼭 해봐야 아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눈앞에 놓인 벽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많다.
폴란드 출신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여류 시인이다. 2년 전 그녀의 시 중 『첫눈에 반한 사랑』이 그림책으로 나왔었다. 그녀의 시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이다. 무심한 듯 가져오는 시어들은 뒤돌아보다 들킨 무엇처럼 당혹스럽고 아득하다. 그런 그녀의 작품하나를 그림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몇 번을 되읽게 하는 그녀의 시도 시이지만 그림과 시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놀잇감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던 그림책. 나는 그림책에 있는 그림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림은 글의 내용을 보충하는 부자재처럼 여겼었다. 예전에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림은 중요하지 않았다. 글의 내용만 아이들에게 잘 입력시켰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접한 쉼보르스카의 그림책 한 권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입문시켰다. 기억 저편에 던져두고 있었던 감정들을 들고 왔고,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인연들을 호명하며 내 앞으로 끌고 왔다.
새로 입문한 세상은 거대한 제국처럼 다채롭고 황홀했다. 그림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치유받고 있음을 느꼈다. 치유는 병원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책의 갈피 갈피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단순하거나 혹은 복잡한 그림은 그 자체로 언어가 되어 있었다. 짧거나 혹은 잠시 이어지는 문장은 단말마의 호흡만 허락하고는 긴 사색을 요구한다. 가끔 수백 페이지짜리 책이 갖는 주제를 단숨에 내 가슴에 훅하고 던져 넣는다. 세상의 수많은 그림책 작가는 사랑의 전도자이자 숨겨진 철학자이다.
그래도 ‘그림책’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잠시 그 세계를 넘보기로 했다. 작가별로 탐독하는 권수가 쌓이면서 나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림책 관련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책들로 그림책의 세계에 더욱 빠져 들었다. 무작정 ‘그림책 학교’에 등록하기보다는 맛보기로 ‘나만의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듣기로 했다. 평소에 읽던 그림책이 쉬워 보였던 거다. 저 정도 그림이면 나도 몇 번의 작업을 거쳐서 해낼 것 같았고, 글도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야무졌지만 착각이었다.
우리나라에만도 그림책 작가가 되려고 준비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입 장벽이 낮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달려들지만, 그 세계에는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고 기존 작가들을 뛰어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모두 출판사의 간택을 간절히 기다리는 한낱 ‘지망생’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림책은 순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오늘도 신기루 가루를 뿌려 주고 있다.
나?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신기루를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다. 물론 작업에 들어가는 과정은 의외로 고통스럽고 모호하다. 생짜 초보니 당연하겠지만 스토리보드를 짤 때마다 그림이 달라지고 글의 내용도 완전히 달라진다. 살아있는 생물을 대하는 느낌이다. 나는 하얀 귀 끝만 보고 무작정 따라가는 토끼잡이 같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다가도 ‘누가 책을 만들댔나, 좋아서 그냥 해보는 거지.’라며 마음이 수없이 왔다 갔다 한다. 하지만 포도원 밖에서 저건 ‘신포도’라고 단정 짓는 여우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냥 좋은 거다. 즐기는 사람은 못 이긴다고 하지만 그럴 정도의 실력도 없다. 그림책 작가 고정순의 에세이 책 제목은 『그림책이라는 산』이다. 그가 작업하며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림책은 오르고 올라가도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 ‘신기루 산’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한 발짝씩 오르고 싶다. 꼭대기에서 어서 오라고 하는 사람 없다. 오르면서 숲에 핀 꽃들도 보고 산길에 떨어진 개암나무 열매도 주우면서 가보고 싶다. 갑자기 나타난 청설모에 반가운 인사도 건네며 피톤치드 가득한 이 길을 걷고 싶다.